[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은 건 삶이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열심히 내 일만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는 때로 삶을 어려운 궁지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최익성이 한화로 트레이드된 1999년은 그가 자신있게 ‘전성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최익성은 뜻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펼칠 수 없었다. 기량 탓 만은 아니었다.

최익성을 원한 것은 당시 한화 사장이었던 이남헌 사장이었다. 이 사장은 최익성의 플레이 스타일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화 감독이던 이희수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기존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최익성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사이에 끼어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뒤 짐을 싸 대전으로 갔다. 조금 어색했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겐 야구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다. 삼성이 날 보낸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더 독해지고 강해졌다.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어찌나 훈련을 많이 했는지 코치님들이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건 내가 이제껏 했던 일 중 가장 쉬운 일이었다.

이정훈 코치님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선수 시절 악바리로 불렸던 이 코치님은 내게 늘 조금 모자란 듯한 훈련량을 요구했다. 자신이 너무 지나친 훈련 탓에 부상이 잦았던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내 직성이 풀릴때 까지 훈련했다.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코치님도 결국은 날 도와주셨다.

그렇게 99시즌이 시작됐다. 당시 한화 외야는 무척 탄탄했다. 송지만 데이비스 이영우로 이어지는 라인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그러난 난 한번도 뒤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출발 선상에서 스타트만 된다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같은 출발만 되면 말이다.

시범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10타수 3안타 1홈런. 무난했다. 그리고 개막전. 공교롭게도 대구 삼성전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한때 내 심장이었던 대구 야구장. 난 밤잠을 설쳤다. 최고의 컨디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징크스도 한꺼번에 동원했다. 내가 미친 듯 뛰어다니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만원 관중이 들어찬 대구구장은 경기 전부터 들썩였다. 양 팀 선수 소개가 이뤄지는 순간, 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스타팅 멤버에 내 이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경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은 많고 준비는 돼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한번만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걸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3연전 동안 난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다. 허탈했지만 넋을 놓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5번째 경기를 앞두고 이영우가 손목 부상을 당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영우에겐 미안했지만 내겐 기회였다. 그러나 난 그 경기도 선발 출장하지 못했다. 다른 선수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오래지 않아 내게 찬스가 왔다. 5회부터 대타로 등장. 난 2타수2안타1홈런을 때려냈다. 이후 꾸준한 출장이 이뤄졌고 난 5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최고의 감각을 이어갔다. 시즌 초반이었지만 타격 전 부문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됐다. 출발은 좀 늦었지만 이제 전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난 다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됐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친하게 지내던 한 코치님께 물었다. “제가 왜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겁니까.”

코치님은 조용히 “익성아, 미안하다. 우리도 이야기는 하고 있다”고 하셨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고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데 왜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일까.

팀은 내게 대타를 원했다. 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은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난 거칠어졌다. 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였고 더 큰 먹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건 그 덩어리가 너무 작았다.

그 무렵, 뜻하지 않은 부상이 찾아왔다. 송구 도중 오른쪽 어깨 인대에 무리가 온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난 통증을 참으며 경기에 나섰다. 가뜩이나 부족한 기회마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혼도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손가락도 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적된 스트레스 탓에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난 2군으로 내려가야 했다.

힘겹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날, 한 코치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된다. 트레이드가 거의 성사단계라는 것이었다. 난 기뻤다. 감독님도 “다 됐으니까 준비 잘 하고 있으라”며 격려해 주셨다.

하지만 결국 트레이드는 무산됐다. 나중에 들으니 사장님의 반대가 있었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내게 더 중요한 건 눈 앞에 놓인 야구였다.

삼성과 한화팬들 덕에 올스타 베스트9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후반기를 마쳤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롯데와 경기는 잊을 수가 없다. 스타팅 멤버는 아니었지만 경기를 즐긴다는 마음이었다. 사직 구장 3만 관중의 함성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1차전서 난 4-4 동점 상황에서 대타로 나가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홈런을 때리고 그라운드를 도는데 구장 전체가 고요했다. 삼성 2군에서 경기해본 이후 홈런치고 조용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결국 한화는 4승 1패로 롯데를 꺾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다. 내 야구 인생에서도 첫 번째 경험이었다. 난 축하연에서 단상에 올라가 춤까지 춰가며 기쁨을 만끽했다. 지나온 세월을 잊고 새출발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세상은 또 한번 요동치고 있었다. 선수협 사태는 내 인생을 또 한번 알 수 없는 곳으로 몰아갔다.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