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2000년 이후 최익성은 거의 해마다 팀을 바꾸게 된다. 프로 세계에서 팀을 옮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지니스의 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트레이드를 '실패'로 규정 짓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일종의 용도 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익성의 변화다. 최익성도 처음엔 팀이 자꾸 바뀌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좌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도 자신감을 잃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자신감이 생기는 듯 느껴졌다. 허세가 아니었다. 야구 선수로서 힘겨운 시간이 인간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였다고 했다.

LG 유니폼을 처음 입었을 땐 솔직히 한해정도 쉬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어깨 부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재활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팀도 팀이지만 내가 먼저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 계획은 첫날부터 무너졌다. 트레이드 후 구단에 첫 인사를 가는 날, 사장님은 날 정말 극진히 대해주셨다. 나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다. 이광은 당시 LG 감독님은 내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트레이드에 나섰다고 말씀해 주셨다. 날 필요로 하는 팀에서 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잘 알기에 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뛰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날 원하는 팀과 감독님 앞에서 말이다. 병원에선 계속 수술을 권했다. 하지만 내겐 중요치 않았다. '난 육체를 마음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선수다'라는 주문을 걸며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난 2000년 시즌 내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뛰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오는 단계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물론 동료들도 그런 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난 너무 행복했다. LG에서 뛰는 것이 정말 좋았다. 팬들의 뜨거운 응원도 큰 힘이 됐다.

LG는 아깝게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후회없는 1년이었다.

그리고 난 어깨 수술을 받았다. 재활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또 운명의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여기 해태 타이거즈 인데요…"

FA 홍현우를 LG에서 영입하며 내가 보상선수로 가게됐다. LG에선 내가 수술을 받은 선수이기 때문에 해태가 지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난 "아직 붕대도 풀지 않았는데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큼 정말 LG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난, 절친한 후배 (김)재현이를 불러 밤새 술을 마셨다.

하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을 꾸려 광주로 향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해태 역시 날 많이 반겨 주었다. 김성한 감독님은 거포가 부족한 만큼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또 힘이났다.

수술 후 재활기간은 적어도 6개월은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난 욕심이 났다. 해태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방망이를 잡고 싶었다.

문제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 희한한(?) 타격폼이 문제였다. 내 훈련 과정을 본 적 없는 해태 코치님들은 날 이상한 선수로 보기 시작했다.

난 내가 왜 그렇게 치고 있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코치님들 눈에 비친 나는 단지 말대꾸하는 선수였을 뿐이었다. 주위에선 날 두고 "코치 지시에 토를 다는 첫 해태 선수"라고 수근거렸다.

나는 어디에 있거나 누구와 있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 내 신념과 나 자신이다. 적어도 날 몇달이라도 지켜본 뒤 타격폼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바랐다.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성과가 나지 않을 땐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었다.

결국 내 방식은 해태에서의 순탄치 않은 세월을 예고하고 있었다. 2001 시즌은 부상 탓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경기서는 4번 타자를 칠 정도로 회복됐고, 신뢰도 얻고 있었다.

그렇게 2002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스프링캠프 명단 제외라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뺑소니 차량에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한 코치님이 내게 조언을 해 주셨다. 삼성 시절 감독님이었던 분이 당시 KIA 2군 코치님으로 와 계셨다. 그분을 찾아가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분께 전화를 걸었다. "시간되시면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바쁘다며 다음에 보자는 말씀만 하셨다.

며칠 뒤 실내 연습장에서 사건이 크게 터졌다. 그 코치님은 타격 훈련중이던 날 불러 세우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너,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왜, 전지훈련 못가는 것 때문에 그러냐. 그건 네 실력이 없기 때문이야. 이제 알겠어."

모든 동료들과 코치님들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어이가 없었다. 순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돌아섰다.

난 감독님을 찾아갔다. 진짜 이유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야구를 못해 전지훈련을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려 했다.

감독님은 뜻밖의 말을 하셨다. "너 아프다고 해서 안 데려가는건데. 아파서 훈련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더라고."

난 당시 하루도 훈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감독님, 아픈 곳도 없고 훈련을 소홀히 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감독님은 놀라시며 "그래? 그럼 전지훈련 가자. 어서 가서 매니저 오라고 해"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전훈 명단에서 제외됐던 탓에 비자가 준비 안되는 등 문제가 생기며 결국 전지훈련을 가지 못했다.

후에 들은 얘기론 나와 관련된 보고서엔 늘 부상 때문에 정상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2002시즌은 내게 최악이었다. 난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려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고 훈련방식에 대한 문제로 한 코치님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즐기지 않던 술에 의존한 적도 있었다. 날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훈련이 예정돼 있어도 미친 듯이 술을 먹었던 적도 있다. 광주 원정경기를 왔던 (이)승엽이가 도와줘 겨우 숙소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즌의 절반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만후 코치님이 날 부르셨다. "익성아, 네가 겪은 모든 상황들에 대해 내가 사과할게. 넌 잘못 없다. 그리고 너 같은 놈은 꼭 잘돼야 한다. 힘들겠지만 이겨내라."

난 눈물이 났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김 코치님의 도움으로 이틀간 휴가를 낼 수 있었고 그렇게 곧장 길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또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현대로 트레이드 됐다는 것이었다. 너무 기뻤다. 새로운 팀에서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그때, 난 홀로 짐을 꾸려 수원으로 떠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