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최익성은 2005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이후 어떤 팀에도 속하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공식적으로 최익성이 은퇴한 해는 2005년이다.

그러나 최익성은 자신의 은퇴가 2007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진짜 야구를 그만둔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년 동안은 무얼 했다는 것일까. 최익성은 야구를 하기 위해 도전했던 시기까지 자신의 선수 생활 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마지막 까지 버틴 것이 아닌 만큼 끝도 자신이 결정한다는 의미였다.

그 2년간 최익성은 사기를 당하거나 의외의 사건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크게 좌절했지만 그런 시련도 최익성을 무릎꿇게 하진 못했다.

향남이와 훈련을 하던 중 (전)승남이도 합류했다. 둘은 미국 LA로 출국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난 팀 훈련이 필요한 타자였던 탓에 홀로 한국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첫 목표는 미국 독립리그였다. 겨울이 지나고 난 무작정 미국에 들어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승남이로부터 "기약이 없으니 미국 들어오는 걸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도 받았지만 더 이상 한국에 머물러 있는 건 무의미했다.

은퇴 전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뜯긴 나로서는 미국에 가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난 결단을 내렸다. 차를 팔기로 한 것이다.

차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힘겨운 시간 난 차를 타고 길을 달리며 마음의 위안을 찾곤 했다. 내겐 마지막 남은 믿을 구석이었다. 그러나 미국행 의지를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친구에게 차 정리를 맡기고 조금의 여비만 손에 넣은 채 미국으로 향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선배들의 소개로 독립리그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난 근육통이 생긴 허벅지에 바늘을 찔러가며 테스트를 마쳤다. 반응은 좋았다.

그러던 중 한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멕시칸리그서 뛰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를 따라나섰다.

멕시코에서 테스트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 관계자가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나타났다. 당장 멕시코에 남으라는 것이었다. 짐도 챙기지 않은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온 뒤 그 사람은 사기성이 짙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대만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일단 그 스카우트의 추천으로 한 독립리그 팀에서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팀 감독으로부터 직접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 감독은 편법을 써서라도 입단을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뛸 듯이 기뻤다.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로 표현이 안된다. 그러던 어느날, TV에 내 우상이던 호세 칸세코의 동정이 소개되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저 반갑기만 했다.

알고보니 그 뉴스는 칸세코가 독립리그 팀에 입단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들어가기로 한 팀이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그 감독은 구단주가 상품성 높은 칸세코를 택하는 바람에 일단 다른 팀에서 뛸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난 이미 여비가 모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후 한 에이전트를 소개받았다. 에이전트가 있어야 팀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더 이상 미국에 머물 힘이 없던 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날 아껴주시던 분들의 도움으로 힘들었지만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6년이 저물어갈 즈음, 난 다시 미국행을 택한다. 어머님이 말리셨다. 그러나 난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챙겨두셨던 내 마지막 재산을 내주셨다.
하지만 새 에이전트도 내 꿈을 이뤄주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채드 크루터(전 박찬호 배터리)가 감독으로 있는 대학(USC)에서 훈련을 하며 팀을 모색했지만 난데 없이 연락이 두절되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USC에서의 훈련을 행복했다. 이런 곳에서 꼭 야구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석달이 흐른 뒤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다 아무 소득 없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았다. 미국에서의 도전은 인생의 큰 배움으로 남았다. 무엇이든 부딪혀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것이었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수확이었다.

난 성남고 감독으로 있던 홍우태의 도움으로 어린 선수들과 생활하며 마지막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SK에서 연락이 왔다. 김성근 감독님이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겠냐는 의사를 물으셨다는 것이다.

순간, 난 당황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몇달을 허송세월하며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테스트를 받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내 판단 미스였다. 당연히 준비가 돼 있어야 했고, 어떻게든 부딪혔어야 했다. 야구를 1년 이상 쉰 선수에게 준비가 필요하다는 건 그동안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느껴졌을 것이다. 

난 인생의 후회따윈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큰 후회로 남는다. 내 생각이 모자랐다.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성남고에서도 더 이상 훈련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난 도저히 야구를 끝낼 수가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떨어진 뒤에도 야구를 버릴 수 없었다.

난 홀로 산에 들어가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2007년 추석. 어머님을 뵙기 위해 고향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계속 할거니. 이제 그만 둘 수 없을까. 인생엔 더 소중한 것도 있는 거야.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여기서 끝내자."

순간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어머니, 이제 끝낼게요. 이제 야구 그만하겠습니다." 누구도 날 말릴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날 기어코 움직이게 했다.

그제서야 난 내 어깨를 짖눌러 왔던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야구를 좋아했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늘 긴장 속에 보냈던 날들과 남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야구 인생, 이제 끝을 낼 때가 된 것이었다.

난 내 가슴에 말했다. "난 항상 네(내 마음) 말을 믿고 따랐잖아. 다음 인생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널 믿고 갈게. 그게 나니까."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