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의 처남 K는 그렇게 치의대생이 되었다.
야호! 놀자~
공부도 잘 하는  녀석이 놀기도 잘 놀았다.
여자 친구가 수시로 바뀌더니 급기야  헤어진 여자 친구가 울고 불고 집까지 찾아 오는 불상사도 생겼다.
너무 놀았던 탓일까!  입학할 때 어깨에 힘주고  장학생으로 입성 했는데  어느새  유급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된것이다.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는지, 연애가 시시해졌는지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K는 무사히 졸업 했고 얼마후 치과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치과를 개원하려고 폼 잡을즈음 IMF가 터졌다.
가족들은 운이 없다며 K를 위로했다. 그리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치과 개설하려는 건 아니지? 상황을 지켜보고 천천히 해라~"
K는 대답 대신 썩소를 날렸다.
얼마후  은행에서 돈을 왕창 빌려 강남 한 복판에 최고급 인테리어로  치과를 개설했다.
그런데 이게 대박이 났다.
"썩은 이빨은 때워야 한다."
" 딸자식의 튀어나온 이빨은 집어 넣어주고 싶어한다.  부모 잘못 만난 죄니까~ "
아무리 IMF 라도 강남은 이 논리가 통한다는 것이  K의 생각이였다.
강남은  "강남스타일"이 있다는 것이다.
K의 승부수는 적중했다.
개원한지 몇년 되지도 않아  융자를 다 갚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잘나가는  병원까지 팔아 버렸다.  
K의 돌발행동에 부모님은 앓아 누웠고, Y는 달래도 보고, 협박도 하고  생쑈를 다  했지만 K가 한 수 위였다.
그의 고집을 막을 수가 없었다.
K는  몇년 동안 벌어 놓은 돈으로  K대 치과대학원에 들어갔다.
현금 총알이 많아서 일까~ 서글서글해서 일까~
교수들 술사주고 밥사주며 구워 삶더니  초단기간에 석사 과정을 패스했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인가  영어책을  잡더니  미국  뉴욕대학교로 유학을  훌쩍 떠났다.
몇년동안 감감 무소식이더니  미국 박사학위를 득템해서 돌아왔다.
화려한  내공을 쌓은후 이번에는 강북을 공략했다.
그러나 만만치 않았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이다. 
서울대, 연세대 출신들이 왜이리  많은 거야~
뉴욕대를 더 쳐줘야 하는데 강북의 부모들은 서울대, 연세대 하면 꺼뻑 넘어간다.
대략 난감한 상황에서  K는 행동을 개시했다.
제일 먼저 한 것은 동네 치과를 모두 조사한 후  구멍가게 수준의 작은  치과를 찾아가서 선물 공세를 폈다.
그리고 나이 많은 구닥다리 치과 의사들을  모두 모아서 제주도에 초호화 여행을 시켜줬다.
다들  싸가지 있는 젊은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K가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동네 치과의사들이 보기에 그리 밉지가  않았다.
K가 선택한 것은 특화 전략이였다.
자기의 주 특기인 교정 전문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작은 치과의원, 나이 많은 치과의사들은 교정시술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정에 대해 문의 하는 환자가 오면 돌려 보낸다.
K가 나타나기 전에 환자를 돌려 보내던 의사들이  이제 모조리 K의 병원으로 소개시켜 주게 되었다.
소개 받고 K의 병원으로 찾아간 환자들은  병원입구에서부터  주눅들기 시작한다.
완전  "아메리카 스타일" 이다.
환자들은 병원 의사가  뉴욕대 박사 출신임을  한 눈에 알게 된다.
유학시절  흑인, 백인 환자들 진료할 때  찍은 사진으로 온 병원을 도배했기 때문이다.
학생신분으로 실습하면서 찍은 사진인지  미국 현지에 직접 병원을 개설해서 찍은 사진인지 알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콧대 높은 미국인들을 한국인이 치료하고 있는 것이 폼 난다는 것이다.
외국인들이 도배된 반대 쪽 벽에는  뉴욕대 출신 박사가 이쁘장한 여자  아나운서와  같이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공짜로  이쁘게 교정해 줄테니 사진한장 찍자!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여자 아나운서는 이게 왠 떡이냐 하며 미끼를 물은 것이다. 
K는 이빨  한번 교정해주고 홍보효과를 톡톡히 본 것이다..
애들이 치료대에 누으면  천정에서  "뽀로로"가 나오고 "코코몽"이 나온다.
물론 남자애가 누우면 "파워레인져"가 나온다
입소문은 빛의 속도로 번져 나갔다.

"미국 뉴욕대인가 뭔가 아무튼 미국 박사 출신이래!"
"거시기  아나운서도 그 병원에서 했다는 거 아냐~"
"애들이 병원가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 "
"역시 외국물 먹은 의사는 달라~~"
K는 환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 들였다.
한참 부동산 버블이  커지던 때라  여기 저기 대충 샀던 부동산이 펑튀기 되어서 순신간에 갑부가 되어 버렸다.
병원은 안정궤도에 올라가서 알아서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놓고 1년에 반은 해외로 놀러 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평생써도 못 쓸만큼 돈을 모아놓고 지금은 미국에 교환 교수로 가있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0여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이번 겨울에 Y는 부부동반으로  미국 여행을 간다.
Y의 처남 K가 모든 경비를 다 대주며 초대한 것이다.
처남 잘 만나면 이런 호강을 다 하는데 내 처는 무남 독녀라 나는 처남 덕 보긴 글렀다.~

필자는 지금 사업수완이 좋고  운이 좋아 부자가 된 그를 성공한 인생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부러움의 대상이지 분명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삶의 내공이 깊으면  그다지 많은 돈이  필요도 없거니와 돈 많은 사람이 부럽지도 않다.
그러나 K가 삶의 과정중에 던졌던 여러번의 승부수들이 단지 큰 돈을 벌기 위한 배팅이였을 뿐이라고  말한다면 야박한  평가가 아닐까.
동상으로 열 손가락를 모두 잃고도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겠다며 덤벼드는 산악인도 있다.
그들이 산에 오르는 이유가 돈 때문이다, 명예욕 때문이다, 집착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힐러리 경이 당신은 왜 산에 오르는가 하고 물어보자
"산이 저기 있기 때문에 오른다"고 대답했다.
뭐든 해보려는 사람들 중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이도 많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자리에 안주하며  퍼져 있는 것 보다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뭐든 일을 벌려 보는 삶이 보다 감칠맛 난다는 것이다.
K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있어도 그럭저럭 만족 할만한데  매번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도약을 시도했다. 
그의  성공스토리에 많은  운도  따랐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겁도 없이 도전 하고, 큰 행운을 불러 왔던  원동력은 더 크게 성장하고 더 많은 것을 이뤄보고자 하는  "꿈" 이 아니였을까! 
그렇다. 꿈을 간직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열정이 화산처럼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기적의 방쇠는 꿈이다.
꿈을 잃지 않는 자는 누구든 K 못지 않은 성공스토리를 만들 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한가지를 물어보자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뭐지?"
그대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당신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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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얼굴만 봐도 반가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웬종일 안 봐도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아니, 왠만하면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만만한 동료보다  까탈스러운 직장상사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가뭄에 콩나듯  직장상사라도  인격으로나 실력으로나 존경할 만한 사람도 있다.
천연기념물처럼 귀하지만 말이다.
필자의 직장에  그런 천연기념물 같은 상사가 있어  행운이라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그 상사를 싫어하는 동료들도 많지만 이상하게 나는 그렇지 않다..
이걸 두고 "코드가 맞다"고 표현하나 보다..
가난한 시골출신에 청국장을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고, 시골에서 농사일 도우며 학교 다녔던 것도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 분은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나오고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이렇게 코드가 맞다 보니 직장상사의 무용담과 인생역정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약간의 불편함도 있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그 직장상사가 아니다.
그의  처남에 대한 이야기다.
직장상사가 SKY대학의 Y 대출신이니  편의상 Y로 하자.
Y는 시골출신에 순진하기까지 해서 군대까지 갔다 온 예비역에 졸업반이였지만  줄곳 쏠로 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남들이 들어보면 그리 대단한 사랑도 아니다.
겨우 3번 만났는데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운명의 장난일까 하필 그 여인은 제주도에 살고있다.
휴대폰도 없고 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과외하면서 학비를 벌어야 할 형편이라  비행기 타고 날라 다니며 데이트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하필 장남이라  집에서 빨리 결혼하라고 난리다.
게다가 타고난 효자라  눈물을 머금고 진도 안나가는 제주도 여인과의 인연은 다음생으로 연기하고  가까운 서울에서 짝을 찾기로 결심했다.
이별을 통보하고 쓴 소주로 아픈 마음을 달래던 그 날밤!
술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동기생에게  괜찮은 아가씨 소개를 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비록 스타일 촌스러운 시골 출신이지만 그래도 Y대 출신인지라 금세 반응이 왔다. 
며칠 후 소개팅 건 수가 생긴 것이다.
첫 만남에 Y는 시큰둥했다. 
이상형이던 감귤 아가씨를 차마 마음에서까지 지우지 못한지라  말도 별로 하지 않고 줄곳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생머리의 청순한 소개팅녀는  왠지 고독해 보이는 Y에게 필이 꽃힌 모양이다.
여자가 너무 들이대면 매력이 떨어지는데 그 날 이후 그녀는 Y에 적극적이였다.
도서관에 이쁜 꽃 편지도 꼽아 두고 , 시집도 선물해 주고 지극 정성으로 Y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여전히 Y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직도 그의 주변은 제주도 감귤향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Y의 무관심에 지쳐가던 그녀가  어느날 심각한 목소리로  상의 할 게 있다며  만나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순하고 착한 Y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녀의 전략은 적중했다.
훗날 Y의 처남이 되는 남동생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며 둘의 관계는 급발전 하게 되었다.
비록 2류 대학이지만 서울 소재 대학만 졸업해도 취업이 걱정없던 시절인데  남동생의 책상위에 고3 교과서를 발견한 것이다.
학교를 때려 치우고 재수를 하겠다는 거다.
웬만하면 계속 다니라는 말에도 막무가네 였다. 
학과도 마음에 안 들고 학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고집을 피웠다.
이제 관점을 Y의 처남으로 바꿔보자.  
어느날 느닷없이 나타난 누나 남친이라는 양반이 자기의 미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참견이다.
자기만 명문대 다니면 다냐!  사나이 야망에 계속 테클을  걸어오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보란듯이  휴학을 해버렸다. 
그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서관 붙박이가 되더니 다음 해 봄  폼 잡고 경희대 치의예과를 다니게 되었다.
Y는 이때부터 처남의 범상치 않은 기질을 발견했다고 한다.
Y의 처남 K의 활약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기대하시라  2부는 다음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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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대한민국 최고의 성공포탈이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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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최익성은 2005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이후 어떤 팀에도 속하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공식적으로 최익성이 은퇴한 해는 2005년이다.

그러나 최익성은 자신의 은퇴가 2007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진짜 야구를 그만둔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년 동안은 무얼 했다는 것일까. 최익성은 야구를 하기 위해 도전했던 시기까지 자신의 선수 생활 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마지막 까지 버틴 것이 아닌 만큼 끝도 자신이 결정한다는 의미였다.

그 2년간 최익성은 사기를 당하거나 의외의 사건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크게 좌절했지만 그런 시련도 최익성을 무릎꿇게 하진 못했다.

향남이와 훈련을 하던 중 (전)승남이도 합류했다. 둘은 미국 LA로 출국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난 팀 훈련이 필요한 타자였던 탓에 홀로 한국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첫 목표는 미국 독립리그였다. 겨울이 지나고 난 무작정 미국에 들어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승남이로부터 "기약이 없으니 미국 들어오는 걸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도 받았지만 더 이상 한국에 머물러 있는 건 무의미했다.

은퇴 전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뜯긴 나로서는 미국에 가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난 결단을 내렸다. 차를 팔기로 한 것이다.

차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힘겨운 시간 난 차를 타고 길을 달리며 마음의 위안을 찾곤 했다. 내겐 마지막 남은 믿을 구석이었다. 그러나 미국행 의지를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친구에게 차 정리를 맡기고 조금의 여비만 손에 넣은 채 미국으로 향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선배들의 소개로 독립리그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난 근육통이 생긴 허벅지에 바늘을 찔러가며 테스트를 마쳤다. 반응은 좋았다.

그러던 중 한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멕시칸리그서 뛰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를 따라나섰다.

멕시코에서 테스트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 관계자가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나타났다. 당장 멕시코에 남으라는 것이었다. 짐도 챙기지 않은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온 뒤 그 사람은 사기성이 짙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대만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일단 그 스카우트의 추천으로 한 독립리그 팀에서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팀 감독으로부터 직접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 감독은 편법을 써서라도 입단을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뛸 듯이 기뻤다.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로 표현이 안된다. 그러던 어느날, TV에 내 우상이던 호세 칸세코의 동정이 소개되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저 반갑기만 했다.

알고보니 그 뉴스는 칸세코가 독립리그 팀에 입단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들어가기로 한 팀이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그 감독은 구단주가 상품성 높은 칸세코를 택하는 바람에 일단 다른 팀에서 뛸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난 이미 여비가 모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후 한 에이전트를 소개받았다. 에이전트가 있어야 팀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더 이상 미국에 머물 힘이 없던 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날 아껴주시던 분들의 도움으로 힘들었지만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6년이 저물어갈 즈음, 난 다시 미국행을 택한다. 어머님이 말리셨다. 그러나 난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챙겨두셨던 내 마지막 재산을 내주셨다.
하지만 새 에이전트도 내 꿈을 이뤄주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채드 크루터(전 박찬호 배터리)가 감독으로 있는 대학(USC)에서 훈련을 하며 팀을 모색했지만 난데 없이 연락이 두절되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USC에서의 훈련을 행복했다. 이런 곳에서 꼭 야구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석달이 흐른 뒤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다 아무 소득 없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았다. 미국에서의 도전은 인생의 큰 배움으로 남았다. 무엇이든 부딪혀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것이었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수확이었다.

난 성남고 감독으로 있던 홍우태의 도움으로 어린 선수들과 생활하며 마지막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SK에서 연락이 왔다. 김성근 감독님이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겠냐는 의사를 물으셨다는 것이다.

순간, 난 당황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몇달을 허송세월하며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테스트를 받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내 판단 미스였다. 당연히 준비가 돼 있어야 했고, 어떻게든 부딪혔어야 했다. 야구를 1년 이상 쉰 선수에게 준비가 필요하다는 건 그동안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느껴졌을 것이다. 

난 인생의 후회따윈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큰 후회로 남는다. 내 생각이 모자랐다.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성남고에서도 더 이상 훈련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난 도저히 야구를 끝낼 수가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떨어진 뒤에도 야구를 버릴 수 없었다.

난 홀로 산에 들어가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2007년 추석. 어머님을 뵙기 위해 고향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계속 할거니. 이제 그만 둘 수 없을까. 인생엔 더 소중한 것도 있는 거야.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여기서 끝내자."

순간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어머니, 이제 끝낼게요. 이제 야구 그만하겠습니다." 누구도 날 말릴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날 기어코 움직이게 했다.

그제서야 난 내 어깨를 짖눌러 왔던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야구를 좋아했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늘 긴장 속에 보냈던 날들과 남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야구 인생, 이제 끝을 낼 때가 된 것이었다.

난 내 가슴에 말했다. "난 항상 네(내 마음) 말을 믿고 따랐잖아. 다음 인생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널 믿고 갈게. 그게 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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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2004시즌이 끝난 뒤 최익성은 삼성에서 방출된다. 그에게 손을 내민 팀은 SK.
 
그러나 최익성은 의외의 제안을 한다. 계약하기 전 팀에 합류해 테스트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방출 선수가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혹자는 최익성의 괜한 오만과 고집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었다.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팀에서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의 누적된 상처가 그를 힘겹게 몰아부쳤다.
 
다만 그는 대화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포기하는 법도 몰랐다.

 
현대로 옮겨가면서 난 사람들에게 "언제 또 옮겼냐"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내 이미지가 형성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첫해는 꽤 괜찮았다. 운동장에 있는 자체가 즐거웠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어 좋았다. 난 좌투수 전문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우완 투수나 언더핸드 투수에겐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선을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전혀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상황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꼭 다시 한번 운동장을 미친 듯이 누벼보고 싶었다. 2002 시즌이 끝난 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3년 스프링캠프 부터 또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내 타격폼이 또 문제가 됐던 것이다.

이번에도 코치님으로부터 타격폼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조금만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해도 그런 내 스타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속 시원히 남자답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2003시즌은 그렇게 시작했다. 역시 출발은 좌투수 전문 타자였다. 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부상이 먼저 발목을 잡았다. 시즌 초 잠실 경기였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공을 잡기 위해 달리다 보니 어느새 펜스였다.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끝까지 가면 공을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펜스에 부딪힐 것이 분명하다.

망설이지 않았다. 펜스를 향해 돌진했다. 내 야구는 그런 것이니까. 공은 잡았지만 무릎을 다쳤다. 결국 난 2군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2군에선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지만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한국시리즈를 앞둔 연습경기서는 9타수 7안타를 쳤지만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렇게 현대와도 이별이었다. 이번엔 친정팀 삼성에서 연락이 왔다. 단장님까지 직접 연락을 해오셨을만큼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삼성에서도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난 다른 선수들과는 출발부터 다른 선수다.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입단했던 선수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순 없었다.

내 타격폼이 교과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폼으로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며 버텨왔다. 그러나 훈련이 시작되면 늘 그 폼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내겐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실패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주위에선 이런 조언을 했다. 감독님이나 코치님 앞에서만 하는 척 하다 경기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고. 그러나 난 그런 융통성도 기본기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방식대로 인정받는 것 뿐이었다.

다시 시작된 대구 시절은 날 지치게 했다. 다들 날 오뚜기라고 했지만 좌절 또한 컸다.

그때 홀로 술 먹는 법을 배웠다.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바닥까지 추락해봐야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는 것 하나까지 신경쓰며 야구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삶에 지칠때면 한번쯤은 술에 기대기도 했다.

그렇게 한번 쓰러지고 나면 난 다시 그 친구(술)를 멀리한 채 야구에 전념했다.

2004년이 그렇게 흐르고, 코치님들은 내게 1년 더 뛸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는 내가 아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난 방출을 원했다. 지난 1년과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난 또 방출선수가 됐다.

이젠 정말 날 원하는 곳에서 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SK에서 연락아 왔다. 더 이상 그런 전화가 기쁘지만은 않았다.

난 구단에 테스트를 제의했다. 그저 선수 한명을 뽑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걸 직접 보고 판단해주길 바랬다.

SK 구단에선 황당해 하면서도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난 영입 제의를 물리치고 테스트를 자청한 뒤 입단한 첫 방출 선수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안고 SK에 입단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겨울 SK는 KIA에서 박재홍을 영입하고 FA로 팀을 떠날 예정이었던 조원우와도 계약을 하게 된다. 한순간에 외야가 포화상태가 됐던 것이다.

시범경기서 난 9타수 5안타 2홈런의 맹타를 휘둘렀고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다.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10타석 만에 2군으로 내려가야했다.

그리곤 2군과 1군을 오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김없이 부상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절대 휴식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TV 하이라이트 속에 비친 날 볼 수 있었다.

내 스윙이 아니었다. 거칠지만 호쾌하던 스윙은 온데 간데 없고 한없이 작아진 날 볼 수 있었다. 계속되는 타격폼 수정 지시에 반발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폼이 작아졌던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내가 돼 있었다.

난 다음날 경기가 기다려졌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법도 찾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삼성 전병호를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때려냈고 다음 경기서도 또 홈런을 쳤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홈런 한방을 또 때려낸다. 추석 연휴, LG전이었다. 1-3으로 뒤진 9회말 2사 1,2루. 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는 김민기. 난 바깥쪽 승부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깥쪽 커브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방망이가 나갔고 손목이 가볍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공은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끝내기 스리런 홈런. 완전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던 한방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2005년이 끝난 뒤 SK에서 다시 방출된다. 코치님들로부터 절대 방출은 없다는 약속까지 받았었지만 끝내 방출됐다. 그것도 모든 팀들이 전력 보강을 마친 11월31일에.

며칠 뒤 민경삼 당시 SK 운영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날 많이 챙겨주셨던 분이다. 내가 트레이닝 파트에 노하우가 있으니 관련 준비를 하고 있으면 코치로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웠지만 거절했다. 학연도 지연도 없는 놈이,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코치를 할 수 없게될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난 야구 선수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다시 내 감각을 찾은만큼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 앉게됐지만 포기는 없었다. 날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최향남과 함께 화악산에 들어가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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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2000년 이후 최익성은 거의 해마다 팀을 바꾸게 된다. 프로 세계에서 팀을 옮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지니스의 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트레이드를 '실패'로 규정 짓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일종의 용도 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익성의 변화다. 최익성도 처음엔 팀이 자꾸 바뀌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좌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도 자신감을 잃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자신감이 생기는 듯 느껴졌다. 허세가 아니었다. 야구 선수로서 힘겨운 시간이 인간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였다고 했다.

LG 유니폼을 처음 입었을 땐 솔직히 한해정도 쉬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어깨 부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재활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팀도 팀이지만 내가 먼저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 계획은 첫날부터 무너졌다. 트레이드 후 구단에 첫 인사를 가는 날, 사장님은 날 정말 극진히 대해주셨다. 나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다. 이광은 당시 LG 감독님은 내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트레이드에 나섰다고 말씀해 주셨다. 날 필요로 하는 팀에서 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잘 알기에 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뛰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날 원하는 팀과 감독님 앞에서 말이다. 병원에선 계속 수술을 권했다. 하지만 내겐 중요치 않았다. '난 육체를 마음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선수다'라는 주문을 걸며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난 2000년 시즌 내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뛰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오는 단계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물론 동료들도 그런 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난 너무 행복했다. LG에서 뛰는 것이 정말 좋았다. 팬들의 뜨거운 응원도 큰 힘이 됐다.

LG는 아깝게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후회없는 1년이었다.

그리고 난 어깨 수술을 받았다. 재활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또 운명의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여기 해태 타이거즈 인데요…"

FA 홍현우를 LG에서 영입하며 내가 보상선수로 가게됐다. LG에선 내가 수술을 받은 선수이기 때문에 해태가 지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난 "아직 붕대도 풀지 않았는데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큼 정말 LG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난, 절친한 후배 (김)재현이를 불러 밤새 술을 마셨다.

하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을 꾸려 광주로 향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해태 역시 날 많이 반겨 주었다. 김성한 감독님은 거포가 부족한 만큼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또 힘이났다.

수술 후 재활기간은 적어도 6개월은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난 욕심이 났다. 해태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방망이를 잡고 싶었다.

문제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 희한한(?) 타격폼이 문제였다. 내 훈련 과정을 본 적 없는 해태 코치님들은 날 이상한 선수로 보기 시작했다.

난 내가 왜 그렇게 치고 있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코치님들 눈에 비친 나는 단지 말대꾸하는 선수였을 뿐이었다. 주위에선 날 두고 "코치 지시에 토를 다는 첫 해태 선수"라고 수근거렸다.

나는 어디에 있거나 누구와 있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 내 신념과 나 자신이다. 적어도 날 몇달이라도 지켜본 뒤 타격폼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바랐다.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성과가 나지 않을 땐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었다.

결국 내 방식은 해태에서의 순탄치 않은 세월을 예고하고 있었다. 2001 시즌은 부상 탓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경기서는 4번 타자를 칠 정도로 회복됐고, 신뢰도 얻고 있었다.

그렇게 2002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스프링캠프 명단 제외라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뺑소니 차량에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한 코치님이 내게 조언을 해 주셨다. 삼성 시절 감독님이었던 분이 당시 KIA 2군 코치님으로 와 계셨다. 그분을 찾아가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분께 전화를 걸었다. "시간되시면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바쁘다며 다음에 보자는 말씀만 하셨다.

며칠 뒤 실내 연습장에서 사건이 크게 터졌다. 그 코치님은 타격 훈련중이던 날 불러 세우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너,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왜, 전지훈련 못가는 것 때문에 그러냐. 그건 네 실력이 없기 때문이야. 이제 알겠어."

모든 동료들과 코치님들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어이가 없었다. 순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돌아섰다.

난 감독님을 찾아갔다. 진짜 이유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야구를 못해 전지훈련을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려 했다.

감독님은 뜻밖의 말을 하셨다. "너 아프다고 해서 안 데려가는건데. 아파서 훈련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더라고."

난 당시 하루도 훈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감독님, 아픈 곳도 없고 훈련을 소홀히 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감독님은 놀라시며 "그래? 그럼 전지훈련 가자. 어서 가서 매니저 오라고 해"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전훈 명단에서 제외됐던 탓에 비자가 준비 안되는 등 문제가 생기며 결국 전지훈련을 가지 못했다.

후에 들은 얘기론 나와 관련된 보고서엔 늘 부상 때문에 정상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2002시즌은 내게 최악이었다. 난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려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고 훈련방식에 대한 문제로 한 코치님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즐기지 않던 술에 의존한 적도 있었다. 날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훈련이 예정돼 있어도 미친 듯이 술을 먹었던 적도 있다. 광주 원정경기를 왔던 (이)승엽이가 도와줘 겨우 숙소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즌의 절반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만후 코치님이 날 부르셨다. "익성아, 네가 겪은 모든 상황들에 대해 내가 사과할게. 넌 잘못 없다. 그리고 너 같은 놈은 꼭 잘돼야 한다. 힘들겠지만 이겨내라."

난 눈물이 났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김 코치님의 도움으로 이틀간 휴가를 낼 수 있었고 그렇게 곧장 길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또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현대로 트레이드 됐다는 것이었다. 너무 기뻤다. 새로운 팀에서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그때, 난 홀로 짐을 꾸려 수원으로 떠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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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우리가 송진우(은퇴.한화 코치 연수 예정)를 여전히 '회장님'이라 부르는 건 그가 초대 선수협회 회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구단의 강한 협박과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신의를 지켜낸 상징적 인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송진우 뿐 아니다. 양준혁 마해영 최태원 박정태 김재현 심정수 등 당시의 주축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 선수협회를 만들고 끝까지 지켜낸 사람은 그들 스타 플레이어들만은 아니었다.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들도 함께 남아 선수협회를 지켜냈다.

어쩌면 그들의 공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구는 할 수 있었던 특급 수들과는 달리 진짜 야구 인생을 걸고 도전했었기 때문이다. 최익성은 지금도 그들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며 이야기하는 몇 안되는 야구인이다.

최익성은 최근 선수협회가 자신에게 1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그때 끝까지 남아 싸웠던 잊혀진 선수들을 찾아 감사패를 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1999시즌 우승 후 어깨 치료를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무심코 집어든 신문에서 놀라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프로야구 노조 분쟁'이라는 검은 글씨의 제목.

처음엔 그렇게 큰 일인 줄 몰랐다. 절친했던 양준혁 선배가 도와달라기에 그러겠다고 했었을 뿐이다.

예상보다 파장이 컸다. 구단 사무실에 들어가자 선수단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구단은 구단대로 선수들을 갈라 놓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난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았다. 늘 하던대로 행동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준 야구, 그 야구를 위해서, 후배를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선수들은 날 따랐고 고참들은 한발 물러서 있었다. 중간쯤 위치였던 내가 결국 리더가 됐다.

후배들은 매일 내게 연락을 했고 나를 중심으로 뭉쳐 행동했다. 그리고 총회 당일. 우리는 집결지에 모여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려 했다.

먼저 선배들이 막아섰다. 내게 크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네가 뭔대 애들을 이끌고 가냐. 한화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설치냐. 네가 우리 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냐."

난 대답했다. "우리팀, 그리고 선배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한 야구 선배,후배가 있다면 언 언제라도 이렇게 행동할겁니다. 이해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선배도 길을 터주었다. 우린 그제서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었다. 감독님은 버스에 올라타 성난 목소리로 "이제 나랑 야구 안하겠다는 포기 각서를 쓰면 보내주겠다"고 외치셨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다. 난 앞으로 나갔다. 각서를 쓰겠다고 했다. 감독님은 크게 놀라셨지만 난 각서에 지장을 찍고 버스에서 내렸다.

결국 버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서울로 가려했던 후배들을 이끌고 총회장까지 갔다. 그땐 정말 이대로 야구를 못하게 되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동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막상 총회장에 가보니 실망스러웠다. 선수간 갈등,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선수들을 위한 단체인데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크게 불거졌다. 결국 전체가 아닌 일부 선수만으로 선수협회가 출범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생활을 말할 수 없을만큼 힘들고 참담했다. 역삼동의 한 여관에서 단체 생활을 했는데 지도부를 제외하면 밖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머지 선수들은 구단과 가족의 끊임없는 설득에 흔들려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어떻게 이자리까지 왔는데 그걸 포기하느냐. 넌 다른 선수와는 다르다. 입장이 다르니까 순순히 고개 숙이고 야구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셨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 "어머니, 제가 저를 버리고 나를 속이면 야구 계속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는 그 이후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계속되며 하나 둘 씩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그런 선수들을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했다.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용기내어 함께 했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조현 홍우태 박재용 정영규 등 적지 않은 선수들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선수협회를 지켜냈다.

그렇게 고생한 선수들을 모두 배신자를 만들 순 없었다. 난 지도부를 찾아갔다. "선배님, 자신 있으면 대표 8명만 남고 모두 보내줍시다."

실제로 그 선수들은 선수협 사태가 종료되면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선수들은 달랐다. 더 이상 버티면 야구 선수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었다. 또 참석하지 않았던 선수들에게 누군가 우리의 고통을 전해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일부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선수들이 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정말 야구를 그만 둘 각오였다. 그렇다면 몇명이 더 남아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 논쟁을 거치며 난 내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다. 갑자기 야구가 너무 하고싶어졌다.

어깨 부상이 심했던 난, 선수협에 남아선 훈련할 수 없었다. 전지훈련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이유다. 날 배신자로 손가락질 해도 상관 없었다. 구단에는 조건을 달았다. "만약 캠프가 끝난 뒤에도 사태가 종료되지 않았다면 난 다시 선수협에 합류하겠다"는 것이었다.

캠프지에서 난 이정훈 코치님과 한 방에 배정됐다. 매일 밤 설득 작업이 계속됐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코치님이었지만 내 뜻을 굽힐 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됐다. 난 송지만 등 몇몇 후배들과 다시 계획을 짰다.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다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막상 한국에 들어가고 나니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했다. 노조로는 가지 못한 채 선수협으로 남게 됐다.

선수협 문제는 내게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더 이상 한화에 남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범경기가 한참이던 어느날, 난 또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여기 LG트윈스 인데요…" 트레이드였다.

그래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난 행복한 놈이다. 그때 함께했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벗게 된 선수들의 이름을 우린 절대 잊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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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은 건 삶이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열심히 내 일만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는 때로 삶을 어려운 궁지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최익성이 한화로 트레이드된 1999년은 그가 자신있게 ‘전성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최익성은 뜻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펼칠 수 없었다. 기량 탓 만은 아니었다.

최익성을 원한 것은 당시 한화 사장이었던 이남헌 사장이었다. 이 사장은 최익성의 플레이 스타일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화 감독이던 이희수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기존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최익성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사이에 끼어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뒤 짐을 싸 대전으로 갔다. 조금 어색했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겐 야구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다. 삼성이 날 보낸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더 독해지고 강해졌다.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어찌나 훈련을 많이 했는지 코치님들이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건 내가 이제껏 했던 일 중 가장 쉬운 일이었다.

이정훈 코치님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선수 시절 악바리로 불렸던 이 코치님은 내게 늘 조금 모자란 듯한 훈련량을 요구했다. 자신이 너무 지나친 훈련 탓에 부상이 잦았던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내 직성이 풀릴때 까지 훈련했다.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코치님도 결국은 날 도와주셨다.

그렇게 99시즌이 시작됐다. 당시 한화 외야는 무척 탄탄했다. 송지만 데이비스 이영우로 이어지는 라인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그러난 난 한번도 뒤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출발 선상에서 스타트만 된다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같은 출발만 되면 말이다.

시범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10타수 3안타 1홈런. 무난했다. 그리고 개막전. 공교롭게도 대구 삼성전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한때 내 심장이었던 대구 야구장. 난 밤잠을 설쳤다. 최고의 컨디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징크스도 한꺼번에 동원했다. 내가 미친 듯 뛰어다니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만원 관중이 들어찬 대구구장은 경기 전부터 들썩였다. 양 팀 선수 소개가 이뤄지는 순간, 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스타팅 멤버에 내 이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경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은 많고 준비는 돼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한번만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걸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3연전 동안 난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다. 허탈했지만 넋을 놓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5번째 경기를 앞두고 이영우가 손목 부상을 당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영우에겐 미안했지만 내겐 기회였다. 그러나 난 그 경기도 선발 출장하지 못했다. 다른 선수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오래지 않아 내게 찬스가 왔다. 5회부터 대타로 등장. 난 2타수2안타1홈런을 때려냈다. 이후 꾸준한 출장이 이뤄졌고 난 5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최고의 감각을 이어갔다. 시즌 초반이었지만 타격 전 부문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됐다. 출발은 좀 늦었지만 이제 전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난 다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됐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친하게 지내던 한 코치님께 물었다. “제가 왜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겁니까.”

코치님은 조용히 “익성아, 미안하다. 우리도 이야기는 하고 있다”고 하셨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고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데 왜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일까.

팀은 내게 대타를 원했다. 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은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난 거칠어졌다. 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였고 더 큰 먹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건 그 덩어리가 너무 작았다.

그 무렵, 뜻하지 않은 부상이 찾아왔다. 송구 도중 오른쪽 어깨 인대에 무리가 온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난 통증을 참으며 경기에 나섰다. 가뜩이나 부족한 기회마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혼도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손가락도 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적된 스트레스 탓에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난 2군으로 내려가야 했다.

힘겹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날, 한 코치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된다. 트레이드가 거의 성사단계라는 것이었다. 난 기뻤다. 감독님도 “다 됐으니까 준비 잘 하고 있으라”며 격려해 주셨다.

하지만 결국 트레이드는 무산됐다. 나중에 들으니 사장님의 반대가 있었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내게 더 중요한 건 눈 앞에 놓인 야구였다.

삼성과 한화팬들 덕에 올스타 베스트9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후반기를 마쳤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롯데와 경기는 잊을 수가 없다. 스타팅 멤버는 아니었지만 경기를 즐긴다는 마음이었다. 사직 구장 3만 관중의 함성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1차전서 난 4-4 동점 상황에서 대타로 나가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홈런을 때리고 그라운드를 도는데 구장 전체가 고요했다. 삼성 2군에서 경기해본 이후 홈런치고 조용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결국 한화는 4승 1패로 롯데를 꺾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다. 내 야구 인생에서도 첫 번째 경험이었다. 난 축하연에서 단상에 올라가 춤까지 춰가며 기쁨을 만끽했다. 지나온 세월을 잊고 새출발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세상은 또 한번 요동치고 있었다. 선수협 사태는 내 인생을 또 한번 알 수 없는 곳으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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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상사의 명령은 법이나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다. 지시가 옳지 않다 생각되면 문제점을 제기하고 또 수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혹 문제가 바로잡히더라도 괜히 골치 아픈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때문에 그냥 입 닫고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맘 편하게 느껴진다.

최익성은 늘 그게 안됐다. 궁금한게 있으면 찾아가 물어야 했고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건 만나 따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 대상이 감독이어도 상관 없었다. 결국 그의 풍운은 그런 그의 심지 굳은 행동에서 출발하게 된다.

거듭 말하게 되지만 난 교과서적인 타격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초도 부족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 목표는 '메이저리거처럼 치는 것'이었다.

야구를 홀로 독학하며 익히던 대학시절, 난 메이저리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저리그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AFKN에서 새벽에 중계하던 것을 빼면 오후 6시30분 CNN의 스포츠 뉴스를 보는 것이 유일했다.

난 두가지를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야구 뿐 아니라 모든 프로스포츠에 매료됐던 시기였다.

어디서 저런 다이나믹함과 스윙이 나올까. 나는 연구했다. 결론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 힘이다. 결국 기술의 한계는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둘이 함께 된다면 더 큰 능력을 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난 웨이트 트레이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내 우상은 호세 칸세코였다. 칸세코와 같은 선수가 된다는 것이 내 프로젝트였다.

그때만해도 동양과 서양의 야구는 달랐다. 모두들 "우리는 체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들 했다. 일본식 야구가 대세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같은 인간인데…. 내가 노력해서 서양 선수 같은 힘과 체형을 갖추면 되지 왜 안된다고만 먼저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모해 보였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사실 조창수 감독님과도 트러블이 있었다.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타격폼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날 이해해 주시고 다음날이면 웃는 얼굴 맞아주셨다. 늘 감사했다.(대표적인 일본파 지도자인 백인천 감독도 그의 스윙을 용인했었다.)

다시 감독 교체기로 돌아가 보자.

난 소문이 현실로 바뀐 뒤에야 주위에서 왜 날 그리 걱정해 주었는지 알게 됐다. 새로운 감독은 코치였을 때 타격폼 탓에 나와 큰 충돌을 빚었던 인물이었다.

2군 시절 그 코치는 내 타격폼과 캐치볼 실력을 늘 대놓고 놀리곤 했다. 96시즌이 끝나고 마무리 훈련 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타격 훈련하는 그물 뒤에서 어김없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쟨 안돼. 저게 스윙이야. 저렇게 백날 해봐 선수가 되는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 따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 "안된다"는 표현이 너무 괴로웠다.

난 돌아서서 물었다. "코치님, 왜 제가 안된다고 하십니까."

"넌 안돼. 그 스윙으로는 절대 안돼."

"전 할 수 있습니다. 1년만에 좋은 성적도 거두지 않았습니까."

"안돼. 2군에서나 통하지. 넌 130km 넘는 공은 절대 못쳐. 넌 1군 선수가 아니라 2군 선수야."

"전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꼭 해냅니다. 만약 1군에서 좋은 성적이 나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 스윙으로 잘되면…어쨌든 그런 일은 없다."

그렇게 논쟁은 끝이 났다. 1년 뒤 난 20-20을 달성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그 코치가 감독이 된 것이다.

동료들은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환경이나 조건 따윈 생각해본 적 없다.

스프링캠프 때 감독은 내게 한마디를 더 했다. "타격폼 바꿀 수 없겠냐."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첫 풀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나 자신도 스윙에 완전히 적응한 상황이었다.

노스텝으로 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스텝 없이 치면서도 충분히 힘을 실을 자신이 있었다.

아닌 것을 "예"라고 할 순 없었다.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훈련이 끝나자 한 코치님이 날 부르셨다. "익성아, 그래도 감독이니까 시키는대로 해라. 아니면 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야구 인생이 걸린 문제라구요."

하지만 코치님의 말도 무시할 순 없었다.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며 캠프를 마쳤다.

시범경기를 앞둔 어느날, 갑자기 2군행 통보가 내려졌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범경기를 보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선수들이 나보다 잘하면 어쩌지?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내 훈련이었다. 내겐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막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다시 1군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98시즌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시즌 초반 두달간 97년의 두배 가까운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내 타순에 변동이 생겼다. 톱타자였던 난 5번타자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톱타자로 나서는 것이 편했지만 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부상의 덫에 또 빠지고 만다. 무릎에 공을 맞아 수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어깨와 허리를 다쳤다.

주위에선 며칠 휴식을 권했지만 난 어떻게든 경기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시도는 내 성적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얼마 뒤 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타순도 매번 바뀌었다. 5~6개의 타순을 오가며 아쉬움 속에 시즌을 마쳐야 했다. (시즌 타율 2할6푼2리 14홈런 20도루)

시즌이 끝난 어느날,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중간쯤 됐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익성씨 죄송합니다.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됐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서둘러 영화관을 나섰다. 김태한 선배와 김태균, 이승엽 등과 함께 술을 엄청 마셨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날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힘을 냈다. 날 버린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짐을 꾸리고 다시 출발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것이 내 저니맨 인생의 출발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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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화양연화'라는 말이 있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

영화 탓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슬픔이 묻어 있는 느낌이다. 아름다운 순간이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아쉬움, 그래서 더 깊게 묻어나는 애잔함까지.

최익성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1997시즌, 최익성은 야구 선수로서 최고를 경험한다.

비단 20(홈런)-20(도루)을 달성해냈다는 기록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그 시절 최익성은 누군가에게 '믿음'이란 걸 얻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최익성은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를 가장 오랜시간 동안 지켜봐 준 분들이 지도자로 계셨던 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오랜시간? 인연의 기간은 고작 3~4년이 전부였다. 그는 삼성을 떠난 이후엔 길어야 2년간 한 팀에서 뛰었을 뿐이다.

최익성의 '화양연화'가 화려하면서도 아련한 이유다.

1997시즌을 준비하는 기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처음으로 아무런 고민 없이 훈련을 했었던 탓인 듯 하다. 순조롭게 진행됐던 훈련의 기억은 별로 나질 않는다.

훈련은 꽤 힘들었지만 몸이 힘든 것 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삼성의 1번타자를 향해 나아가기만 하면 됐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 언론은 내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8개팀 중 가장 약한 1번타자라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톱타자들은 정말 쟁쟁했다. 이종범(해태) 전준호(현대) 최태원(쌍방울) 유지현(LG) 정수근(두산) 이영우(한화) 등이 각 팀의 톱타자를 맡았다.

인터뷰를 할때면 늘 그에 대한 내 느낌을 물었다. 난 자신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답했다. "지켜봐주세요. 과연 시즌이 끝난 뒤에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궁금하군요."

시범경기서 나는 그야말로 펄펄 날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믿음'을 등에 업고 뛰는데 거칠 것이 있을리 없었다.

난 시범경기 스타로 떠오르며 더욱 이목을 끌었다. 그때만해도 언론의 반응은 반반 이었다.

'모처럼 큰 인재를 발굴했다'는 시선이 있었는가 하면, '시범경기 반짝 스타는 얼마든지 많았다'는 회의론도 있었다.

신경쓰지 않았다. 난 언제나 한결같이 싸워왔을 뿐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마추어건 프로 에이스건 공만 볼 뿐이다. 더 중요한 건 나 자신과 싸움이다.

출발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백인천 감독님은 날 꾸준히 톱타자로 기용해 주셨다.

마음이 너무 편했다. 방망이가 안 맞아도 무조건 출루가 우선이라 생각하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난 조금씩 진화했다. 어느 순간 홈런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도루도 크게 늘었다.

슬럼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홈런이 제법 나오며 "4번타자 같은 1번타자"라는 말을 듣게되면서 내 스윙이 조금씩 커졌던 탓이다.

어느날 감독실에 불려갔다. 백 감독님은 "익성아, 넌 삼성의 1번타자야. 4번타자가 아니라구. 20-20을 노린다는 기사도 나오던데 네가 벌써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면 되겠냐."

난 솔직히 20-20이 뭔지도 몰랐다. 한 신문 인터뷰서 그 이야기를 먼저 묻길래래 "그런게 있다면 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이 점차 크게 퍼져나갔다.

어찌됐건 난 마음 깊이 반성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주문했다. "정신 차리자. 넌 몸에 공을 맞아서라도 출루만 하면 되는 톱타자다. 잊지 마라."

백 감독님은 내게 정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처음 톱타자로 기용되던 1996시즌 중반. 난 슬라이딩 캐치를 하다 발목이 부러지고 말았다.

2루수 정경배가 공을 잡기 위해 함께 달려오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피하지 않았던 탓이다. 충돌은 피했지만 발목이 꺾이며 부러지고 말았다.

신기한 건 그 경기는 아무렇지 않게 마쳤다는 점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자 내 발목은 한눈에도 심각할 만큼 부어 있었다. 병원에선 "어쩌다 이 지경이 되도록 놔두었냐"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깁스를 하고 발목을 짚은 채 감독님께 인사를 드리러 찾아갔다. 감독님은 내게 하얀 봉투 하나를 꺼내주셨다. 그러더니 "이 돈으로 약 지어먹고 좋은 거 많이 먹어라. 돈도 못 버는 연습생이 홀어머니한테 폐 끼치지 말고. 난 널 믿는다. 네가 다시 돌아와도 우리 팀 1번타자라는 걸 잊지 마라."

그 순간은 아픈 것도 잊을 수 있었다. 백 감독님은 날 눈물짓게 한 첫번째 남자였다. 세상에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우리 팀의 감독님인데 못할 것이 없다고 느껴졌었다.

그러나 인연은 그리 길게가지 못했다. 1997시즌 막판, 백 감독님이 쓰려지셨다. 그것도 내 아버지와 같은 뇌졸중으로….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셨다. 그리고 팀은 수석코치이던 조창수 감독님이 맡게 되셨다. 내겐 감독님 못지 않게 소중한 분이셨다. 조 감독님의 지원 속에 난 꾸준히 톱타자를 맡을 수 있었다.

그때처럼 나를 오랫동안(대략 3~4년 정도) 지켜본 사람들이 많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그것이 그렇게 행복한 것인지, 또 프로야구에서 얼마나 중요한건지 그때는 정말 몰랐다.

시즌 막판, 현대와 경기였다. 홈런 19개에 도루 30개를 기록하던 중이었다. 조 감독님이 날 부르셨다. "오늘은 홈런을 한방 노려봐라."

야구하면서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내게 홈런을 노리라고? 어쩐지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내 눈 앞에 멈춰선 공을 받아쳐 담장을 넘겨버렸다.

드디어 20-20을 달성한 선수가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기록에 대해 별 감흥은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것인지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내가 매 경기 최선을 다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삼성의 톱타자를 지켜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컸다.

그해 삼성은 모처럼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이전보다 이름값에선 크게 약해져 있었다. 또 감독님도 중도에 팀에서 이탈하셨지만 팀 전체가 하나로 똘똘 뭉친 결과였다.

난 그해 타율 3할에는 실패했다. 마지막 4경기서 부진했던 탓이다. 그 경기를 나서지 않았다면 3할까지 기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삼성이 자력으로 4강을 확정지으려면 4경기서 3승을 거둬야 했다.

감독님은 내게 출장 의사를 물으셨다. 난 당연히 나간다고 했다. 개인적인 결과는 좋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 관중들의 열기는 내 피를 끓게 했다. 준플레이오프서 쌍방울을 꺾은 삼성은 LG와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삼성은 충격의 2연패를 당한 채 대구로 내려왔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보고 싶었지만 잘 안됐다. 다행히 3차전서 팀은 승리를 거뒀고 나도 첫 홈런을 때려내며 힘을 보탰다.

그리고 4차전. 4-4 동점, 2사 1루서 내가 타석에 들어섰다. 마운드엔 내 야구인생 고빗길서 숱하게 만난 이상훈 선배가 서 있었다.

초구 승부였다. 이상훈 선배의 과감한 공략에 나 역시도 과감하게 맞섰다. '딱'하는 소리와 함께 대구 구장 펜스를 훌쩍 넘어가는 역전 투런 홈런. 난 관중들 향해 펄쩍 펄쩍 뛰며 홈런 세리머니를 했다. 내가 야구를 하며 가장 짜릿했던 순간이었다.

온 세상이 내 이름을 부르는 듯 했다. 경기 후 난 "삼성 팬들에게 한 경기를 더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나 역시도 그 팬들 중 한명이라고 생각했다.

기쁨은 거기까지였다. 아쉽게도 삼성은 5차전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너무 분해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뒤, 내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백인천 감독님이 팀을 떠나신다는 것이었다.

다들 그 소식을 전하며 내 걱정을 해줬다. "너 이제 어떻게 하냐." 처음엔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신임 감독이 누구인지 알게되며 비로서 이해할 수 있었다. 내 야구 인생이 크게 흔들리는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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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 8. 19 미국 오하이오 데이턴~1948. 1. 30 데이턴(O. 라이트)
1867. 4. 16 인디애나 밀빌 근처~1912. 5. 30 데이턴(W. 라이트)

'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행기가 발명되기 이전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그만큼 하늘을 난다는 것은 인간의 오랜 꿈이었다. 그런 오랜 불가능의 벽을 깨고 비행기를 만든 것은 바로 그 유명한 라이트 형제이다. 형 윌버 라이트와 동생 오빌 라이트이다.

그들 형제가 비행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879년 아버지로부터 장난감 비행기를 선물 받고부터였다. 장난감 비행기를 갖고 놀면서 그들은 하늘에 대한 꿈을 키웠던 것이다.

1899년 라이트 형제는 반가운 사실을 알아냈다. 국립정보자료센터인 미스소니언 협회라는 곳에서 각종 정보 및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라이트 형제는 곧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 그때까지 알려진 비행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요청했다. 자료를 검토한 그들은 중요한 것은 기체 구조나 엔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종술임을 알게되었다. “오빌! 기체가 좌우로 기울었을 때 좌우의 날개 면이 휘는 것에 변화를 주면 떠오르는 힘에 차이가 생기게 돼. 그 기우는 차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만 찾아내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곧 그 방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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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의 어느 날, 드디어 그들 형제는 글라이더의 비행 실험을 시작했다. 그들 형제가 만든 글라이더는 엔진이나 프로펠러가 장치되어 있지 않았다. 바람을 타고 날기 때문에 마음대로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이트 형제는 가벼운 엔진을 만들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3년이나 계속되었다.라이트 형제는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12마력의 가벼운 엔진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들의 비행기에는 하나의 엔진이 두 개의 프로펠러를 돌리도록 장치되었다.

마침내 세계 최초의 비행기를 만든 라이트 형제는 시험 비행을 계획했다. 비행 일자는 1903년 12월 17일, 장소는 마을 앞 평야로 정했다. 그러나 초청장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결국 그들 형제의 시험 비행에 참석한 사람은 겨우 5명 이었다.

드디어 시험 비행이 시작되었다.

“야! 비, 비행기가 날아간다!”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관중들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비행기는 윌버의 신호에 따라 오빌이 조종하고 있었다. 비행기는 지면을 떠나 3미터 높이로 뜨더니 100미터쯤 날아갔다. 그리고는 평원에 가볍게 착륙했다.

“와! 성공이다! 라이트 형제가 드디어 해냈다!”

5명의 구경꾼들은 서로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하물며 라이트 형제의 기쁨이야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지만 말이다.

글 - 왕연중(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장) : E-mail -
wangyj39@dreamwiz.com

출처: http://www.ideakeywor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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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시절 최익성(오른쪽). 그의 출발은 사진처럼 주변인이었지만 점차 팀의 주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야구의 격언 중에 매우 유명한 것 중 하나. "한 경기서 최소 3번의 찬스는 옵니다."
실제로 야구를 보다보면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경기를 열심히 쪼개 살펴보면 아무리 강한 상대와 붙어도 3번 정도는 이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인생과 매우 닮아 더 매력적이라는 야구. 때문에 인생에서도 3번의 기회는 찾아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막상 살다보면 선뜻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려워진다. 돈 없고 빽 없는 평범한 우리네 삶에서 '역전의 찬스'는 언감생심. 그저 버텨내기만해도 용하다 싶을 때가 더 많다.
'최익성의 저니맨'은 이제 잠시 성공을 이야기 하려 한다. '지독한 불운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그에게도 '반전의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최익성의 인생에서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네 삶 속에서도 한번 기대해볼만 하지 않을까.
2군 첫해, 난 시즌 막판까지 2군 타격 1위를 달리고 있었다. 하루는 감독님이 물으셨다. "2군 타격왕 하면 소원이 뭐냐." 난 거침없이 대답했다. "1군에서 한 타석이라도 서 보는 것입니다."
타격왕이 확실시되던 어느날, 감독님 호출이 있었다. 그리고 단 한마디. "오늘 1군 가라." 난 정신이 없었다. 꿈같은 현실이었다.
1군 경기 전 훈련이 끝난 뒤 나는 탈진 상태였다. 내겐 너무도 긴 하루였기 때문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있어야 할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삼성은 해태 이강철 선배의 역투에 막혀 0-10으로 지고 있었다. 8회였나 9회였나, 갑자기 내 이름이 불렸다.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구름을 걷는 듯 했다. 하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상대는 여전히 이강철 선배. 눈 감고 떠 보니 볼 카운트 2-0였다. 그리고 3구째 나름 대비하고 힘껏 배트를 휘둘렀다. 포수 파울 플라이.
어디선가 "뛰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덕아웃에 돌아온 뒤 코치님께 치고 달리지 않았다며 꾸지람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2군행 통보.
나중에 알고보니 김충 2군 감독님이 "2군에서 타격왕 하는 선수가 있는데 1군서 뛰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간청해 이뤄진 1군행이었다.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다. 다들 내 1군 경험은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단은 어쩔 수 없이 군에 입대해야 했다. 난 지금은 사라진 6개월 단기사병이었다. 홀어머니 모시고 산 덕(?)에 혜택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것 역시 아버님의 선물이라 생각했다.
짧은 군 생활을 마치고 팀에 복귀한 나는 다시 2군에서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이 흘러가며 시즌이 끝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나면 2군 선수들에겐 인생이 걸린 기로에 서게 된다. 정리되는 선수들의 명단이 발표되는 날이다.
삼성은 95시즌이 끝난 뒤 미국으로 교육리그를 보냈는데 그 명단에서 빠진 선수는 해고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먼저 투수가 호명되고 이어서 포수. 내야수를 거쳐 외야수의 이름이 불렸다. 그리고 마지막 한명. "최익성". 내 인생이 늘 그렇듯, 난 맨 마지막에서야 선택을 받으며 선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평소 동경하던 미국 야구를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였다. 난 그렇게 치열한 45일을 보냈고 '교육리그 최고 유망주'라는 멋진 타이틀을 거머쥐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사이 한국에선 큰 변화가 있었다. 삼성에 백인천 감독님이 부임하신 것이었다. 1996년 첫 팀 미팅. 난 매우 익숙한 한 마디를 듣게 된다.
"난 여러분을 똑같이 평가하고 지켜보겠습니다. 이름이나 이전 성적은 중요치 않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선수가 경기에 나서게 될 것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엔 '바로 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난 나만의 방식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쉽진 않았다. 객관적인 내 위치는 60명 중 50등 정도였다. 아무리 이름값을 따지지 않는다해도 그 차이는 너무 크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백 감독님은 훈련이 끝나면 선수 한명을 지목해 선수들 앞에서 파이팅이나 구호를 이끌어내도록 시켰다. 이 순간만은 모든 선수에게 반말을 해야 했다. 난 내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그날, 난 선수들 앞에서 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감독님께 물었다. "감독님, 제 이름 아십니까." 백 감독님은 약간 당황하신 듯 하더니 껄껄 웃기만 했다.
난 외쳤다. "너희들, 감독님이 내 이름을 잘 모르시는 것 같다. 내 이름을 목청 높여 10번 부르고 끝낸다." 그날 삼성 훈련장에선 처음으로 "최익성"이란 이름이 멀리 울러 퍼져나갔다. 내가 조금이라도 감독님께 더 다가갈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지훈련 초반, 난 한차례 고비를 맞았다. 타격보다 더 엉성했던 내 캐치볼을 비웃는 선배의 농담 한마디에 흔들려 버렸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조바심이 날 약하게 만들었던 탓이다.
그러나 이철성 코치님의 도움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고 무사히 캠프를 마칠 수 있었다.
시범경기서는 잠시 2군으로 떨어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름만 보고 뽑는건가'싶어 또 한번 좌절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기회가 왔다. 1군 주전 선수의 부상이 생기자 내가 가장 먼저 1군에 불려올라갔다.
1군 합류 첫날, 난 선발 출장의 기회까지 얻었다. 상대는 당대 최강 좌투수 이상훈선배였다. 결과? 두타석 내리 삼진. 그리고 세번째 타석은 내야 플라이였다.
다행히 이후로도 기회를 제법 얻었다. 내 보직은 좌완 투수를 상대하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한동안 난 이상훈 송진우 조규제 구대성 등 최강의 좌완 투수들과 맞서야 했다.
빙그레와 경기였다. 0-1로 뒤진 8회. 구대성 선배를 상대로 1안타에 묶인 상황. 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불같은 강속구에 움찔한 사이 볼 카운트 2-0. '또 이렇게 삼진을 당하는구나' 싶었다. 그 짧은 순간, 난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보고 쳐도 못 치는거 눈 감고 쳐보자. 날 만만히 볼테니 정면승부 하겠지. 하나,두~울,셋 타이밍 맞혀 배트나 힘껏 휘둘러 보자.'
이것 저것 아무 생각없이 배트를 휘둘렀다. '딱'. 공이 배트에 맞았다. 순간 손에서 감각이 사라졌다. 눈 깜짝할 사이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 내가 구대성을 상대로 홈런을 친 것이었다. 그것도 프로야구 1군 첫 안타를 말이다.
기쁨도 잠시. 10타수 1안타 1홈런 1타점. 난 아무것도 아닌 성적표를 들고 다시 2군으로 내려왔다.
실망이 컸다. 솔직히 아프다는 핑계로 한동안 훈련도 게을리 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1군 복귀 콜이 떨어졌다. 더 이상 기회를 놓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LG와 잠실 3연전이었다. 첫 경기서 대타로 나서 2루타. 2차전은 3만 관중이 들어찼다.
우리가 1-3으로 뒤진 9회초 2사 만루. 감독님 목소리가 들렸다. "대타 최익성" 마운드엔 내 데뷔전을 망쳐(?)버린 이상훈 버티고 있었다. 또 2스트라이크에 몰렸다.
그러나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계속 파울을 쳐내며 저항했다. 라인쪽으로 파울 타구를 날리고 1루로 달려나가는 순간, 왼쪽 장딴지에 경련이 생기며 그대로 끄러지고 말았다.
잠시 훈련을 게을리했던 탓일까. 짧은 순간, 후회를 했다. 하지만 그대로 쓰러져 있을 순 없었다. 트레이너가 달려와 나를 업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바늘로 찌르면 경련이 멈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달라"고 외쳤다.
긴급 처방 후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다. 좌측으로 날아가는 파울. 1루로 달려나가던 난 또 쓰러졌다. 이번엔 오른쪽 장딴지였다.
다시 트레이너에 업혀 덕아웃으로 돌아와야 했다. 난 감독님을 향해 외쳤다. "저 빼지 말아주세요. 칠 수 있습니다."
심판들까지 덕아웃으로 와서 빨리 선수를 교체하라고 했다. 그러나 감독님은 날 기다려줬다. 다시 바늘로 허벅지를 수차례 찌른 뒤 타석에 섰다.
그게 몇번째 공이었을까. 난 이상훈 선배의 공을 받아쳐 유격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동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트레이너 부축을 받으며 덕아웃에 들어온 난, 한동안 아무 생각이 없었다. 무슨 일이 스쳐간 건지, 좋은 건지 나쁜건지도 몰랐다.
숙소에 돌아와서야 기쁨이 몰려왔다. 며칠 뒤 김용철 타격 코치님이 날 불렀다. "너 1번타자 칠 수 있겠냐. 감독님이 너 1번 타자로 쓰고 싶다신다. 1번 타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연구하고 있어라."
다른 선수들은 이럴 때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모르겠다. 난 세상을 모두 얻은 듯 했다. 그리고 곧바로 1번타자가 무엇인지 공부를 시작했다.
출처: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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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최익성이 LG 선수이던 지난 2000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플레이를 하는 건가요."
프로야구 선수가 허슬 플레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익성은 사정이 좀 달랐다. 이미 온 몸이 부상이라고 할 만큼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최익성은 좀처럼 몸을 사리지 않았다. 경기장에만 나서면 공을 향해 몸을 던지고 굴렀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최익성의 답은 간단했다. "난 원래 그렇게밖에 할 줄 몰라요. 한번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최익성은 그랬다. 늘 절박하게 야구를 했다. 남보다 늦은 출발을 하고도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꿈같은 고3시절을 지나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계명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아버지의 절친한 후배이자 계명대 감독이시던 김충영 감독님은 날 볼때마다 이런 농담을 하셨다.
"넌 흐리멍텅하고 약해서 야구 선수가 될 수 없어." 난 그런 김 감독님의 인정을 받아 당당해게 내 실력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미션은 1학년부터 주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대학 입학 후 난 다시 좌익수를 맡게됐다. 그때 계명대 좌익수는 1년 선배가 맡고 있었다.
그 선배는 1학년때부터 4번타자를 맡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내 목표는 그 선배를 제치고 주전 좌익수를 맡는 것이었다.
하루는 테니스부의 절친한 선배에게 내 꿈을 이야기했더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웃었다.
난 자신 있었다.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조금만 방심하면 승부는 결정날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 처럼 매일 밤 홀로 두배의 훈련량을 소화해냈다.
난 나 자신과 싸움에 능했다. 내 몸은 내 정신을 이기지 못한다. 그렇게 첫번째 겨울을 보냈다.
기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규 시즌이 시작되기 전, 고등학교 팀과 연습경기가 있었다. 난 대타로 나서 볼넷으로 진루했다.
1루로 나간 뒤에는 일부러 리드를 무리하게 잡았다. 투수의 견제가 날아왔고 난 몸을 날려 1루에 슬라이딩을 했다. 투수는 그렇게 3번 정도를 반복하고 나서야 타자와 승부를 했다.
경기 후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익성이를 봐라. 고등학생과 경기서도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하지 않느냐."
내게 상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맘 속엔 이미 고등학생과 경기가 아니었다. 주어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결국 난 1학년때부터 계명대의 주전 좌익수가 될 수 있었다. 거기에 4번타자였다. 난 슬쩍 내게 미소를 보냈다.
다음 목표가 생겼다.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훈련량을 더 늘리는 것 만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모든 훈련이 끝난 뒤 야간 개인 훈련에만 매일 1천개의 스윙을 했다.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나와의 싸움.
아무도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별들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겼다. "네가 위에서 날 보고 있었으니 나중에 증언을 해줘. 그리고 꼭 내가 힘들때 (그때 이야기를 해주며) 내게 힘이 되어줘."
그러나 오래지 않아 또 한번 고난이 찾아온다. 3학년 무렵, 허리 디스크가 온 것이다. 다리를 올릴 수도, 편하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병원에선 야구는 무리라고 했었다.
난 개의치 않았다. 운동선수는 누구나 부상을 당한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1년을 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맞이한 4학년. 부상은 완전히 낫지 않았고 결국 많은 경기를 나설 수 없었다. 타율도 겨우 1할이 넘는 수준에서 끝났다.
국가대표는 커녕 프로팀 지명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잠시 좌절하고 있을 때 삼성에서 테스트 제의가 왔다. 1,2학년 때부터 날 유심히 지켜보며 한때 1차 지명까지도 고려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동봉철 양준혁 김태한 등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도움도 있었다고 들었다.
타격은 생각보다 형편없었다. 너무 오랜 공백이 있었던 탓이다. 대신 주력이 살아 있었다. 난 2군에서 가장 빠르던 선수와 단거리 대결에서 이겼다. 코치님들은 놀라워하며 웃으셨고, 그렇게 입단이 결정됐다.
다음 목표가 생긴 것이다. 어떻게든 1군 한 경기만 뛰자. 유명한 선수가 된다거나 좋은 성적을 낸다는 생각은 없었다. 삼성에서 딱 한경기만 1군에서 뛰어보자. 연습생 최익성이 품은 또 다른 꿈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내 거친 타격폼이 문제가 됐다. 코치님들의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부상 공백을 메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개월이었다. 아무리 훈련해도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듯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김용철 타격 코치님이 이런 제의를 하셨다. "넌, 발이 빠르니까 좌타자를 해보는게 어떻겠냐."
이것 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코치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매일 새벽 특훈을 시켜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좌타자 변신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난 한가지만 생각했다. 좌타자로 기본기를 익히다보면 분명 우타자로서 길이 보일 것이다.
때문에 또 이중 생활이 시작됐다. 정규 훈련 시간엔 좌타자 훈련, 밤에는 나만의 우타자 특훈이 이어졌다. 홀로 내 스윙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덧 봄이 왔고 연습 경기의 시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봄 바람은 내게 남은 시간이 더 줄어들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 즈음, 이상한 자신감이 날 감싸고 있었다. 오른쪽 스윙에서 무언가가 찾아온 것이었다. 바로 코치님을 찾아갔다. "저 오른쪽, 오른쪽이 자신있습니다."
좌타자로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금방 허락이 떨어졌다. 당시 삼성은 최강의 멤버였다. 이만수 강기웅 김용국 양준혁 선배등의 1군만이 아니었다. 2군에도 국가대표 출신 억대 몸값들이 즐비했다.
2군에서도 경기에 나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즌이 개막되었지만 난 2군서도 벤치 멤버였다.
포기하지 않았다. 대주자가 전부였지만 몸을 날리며 내 몫을 하려 애썼다.
기회는 비와 함께 찾아왔다. 비 때문에 2군 경기가 취소돼 대구로 돌아온 뒤 영남대와 연습경기가 잡혔다. 주축 선수들이 쉬었던 덕에 내가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날도 1루에만 나가면 슬라이딩을 반복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내게 대학생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때 투수가 이후 삼성 후배로 들어온 전병호였다.
경기 후 김 충 2군 감독님이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4년여 전 들었던 그 말이 또 들려왔다.
"너희들 익성이 플레이 봤냐. 혼자 열심히 하는거 봤느냐고. 비오고 대학생이라고 대충 하려했던 건 아닌지 반성해 봐."
다음날, 난 8번 지명타자에 이름을 올려놓게 됐다. 축하 반, 비웃음 반의 농담이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너, 감독님하고 계좌 텄냐." "위장오더 아닐까." , "오늘 비 오겠구나." 등등.
난 물러설 수 없었다. 하늘도 내편이라 믿었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난 그날 5타수 5안타를 때려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삼성 2군의 1번타자가 됐다.
 
출처: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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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기본기가 부족하다." 최익성(38)이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귀에 못이
 박히 듯 들어야 했던 이야기다.

실제로 그랬다. 최익성의 스윙은 전혀 교과서적이지 않았다. 결국 그의 거친 스윙은 그가
여려 팀을 전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그 출발점은 늦은 야구 입문 탓이었다. 최익성이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나마 부상 탓에 3학년이 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배트를 잡게 됐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게는 6년 이상 뒤떨어진 출발이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걸림돌이 된다.

우리는 '야구 천재'하면 이종범(KIA)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SK 선수들은 "박재상"이라고 답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박재상이 중학교 2학년때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선수는 "중학교 3학년때 야구 해서 프로 선수가 됐다는 건 중3때까지 한글만 겨우 깨우쳤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 시작해 박사 된거나 다름없다"고 그 차이를 설명해주었다.

어쩌면 야구 선수 최익성은 '고난'을 예고하며 첫 발을 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첫 출발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제법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난, 겁많고 소심한 전형적인 외동아들이었다. 중학교 1학년, 아버지 생신이었다.
갑자기 내게 물으셨다. "익성아, 너 야구 안할래?" 그땐 그 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란걸 알지 못했다.

두려웠다. 그러나 "넌 늦게 시작해도 될 것 같아. 발이 빠르니까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어"라는 아버지 말씀에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아버진 뛸 듯이 기뻐하셨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엔 야구부가 없었다. 그땐 같은 시내로 전학이 안됐다.
어쩔 수 없이 버스로 1시간 거리인 양북 중학교로 전학했고 몇달 뒤 야구부가 있는 경주 중학교로 다시 옮겼다.

막상 야구 선수가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기본을 배우지도 못했고 덩치(당시 162cm 정도)도
 작았다. 다른 애들은 초등학교부터 배웠던 것을 뒤늦게 따라잡으려니 벅찰 수 밖에 없었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던 부상은 그때부터 내 발목을 잡았다. 친구와 목욕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난 친구 자전거의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의 운전 부주의로 뒤로 나가떨어지며 오른 어깨가 박살나며 기절하고 말았다. 어깨 골절 진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난, 그 길로 야구부 숙소에서 나와 몇달간 또 집에서 보내야 했다.

부상에서 회복된 뒤에는 미친듯이 땀을 흘렸다. 내 훈련은 팀 훈련이 끝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팀 훈련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물 주전자를 나르는 것 뿐이었다.

다행히 아버지(전 경북야구협회 전무이사)의 제자가 감독님이셔서 홀로 특훈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3학년때는 제법 경기도 나가며 나름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더 큰 벽에 부딪혔다. 기량 차이는 더 커졌다. 야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자전거 사고를 당해 이번엔 손목을 다쳤다.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1년을 보냈다. 어느날, 술 취해 돌아온 아버지가 날 불렀다.

"익성아, 야구 힘들면 안해도 된다. 너희 학교 야구 부장(아버지 후배)을 만났는데 안 시키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내 아들이 야구 선수로 실패하는 건 보기 힘들다더라."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내 입이 열렸다. "아버지, 3학년때까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절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는 아들이 되진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이제껏 내가 보았던 웃음 중 가장 환하게 웃으셨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한번 해봐라."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 온 난 미친듯이 훈련에만 전념했다. 너무 열심히 하려 했던 탓에 왕따가 될 정도였다.

단체 운동에선 단체 행동이 중요했던 때다. 당시 몇차례 숙소 이탈 사건이 있었다. 난 한번도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이후 날 대놓고 따돌렸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든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늘 건강하시던 분이셨는데…. 눈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울고만 있던 내게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드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구선수 우리 아들이 왔네." 이게
내가 들은 마지막 아버지의 말이었다.

난 이후 3~4시간만 자며 야구에 매달렸다. 중3때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이 약속은 여전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고3때까지는 당당한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6개월 뒤 건장하던 아버지는 뼈만 앙상해진 채로 돌아가셨다. 그 기간 동안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키는 10cm 이상 컸고 몸무게도 10kg 이상 불어났다. 난 확신했다. 아버지가 야구선수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나눠주고 가셨다는 것을.

그리고 또 내게 기회가 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술을 따라잡지 못해 고생하고 있을 즈음,
박영진 감독님이 경주고등학교에 부임하셨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명성이 높던 분이셨다.

박 감독님의 첫 마디는 힘겹던 내게 희망의 빛이 됐다. "난 너희들을 모른다. 이제 내 앞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를 주전으로 쓸 것이다."

추운 겨울 밤, 난 이불속에서 나만의 사투를 벌였다. 그냥 따뜻한 방에서 누워있고 싶은 마음과 싸움이었다.
그러나 난 아버지와 약속을 지켜야 했다. 나 못지 않게 독했던 친구 천호광(현 계명대 교수)과 경쟁하 듯
훈련에 매진했다.

하루는 직접 감독님을 찾아가 매를 때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나보다 잘하는 동료들은 매일같이
 감독님게 맞았지만 유독 난 때리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는 선수를 쓰겠다'던 감독님 말씀만 철썩같이 믿고 난 훈련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날, 감독님이 날
 부르시더니 "1루수 할 수 있겠어?"라고 물으셨다.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며칠 뒤 연습경기를 앞두고 스타팅 라인업이 불리는 순간, "3번타자 최익성"이란 믿을 수 없는 한마디를
듣게 됐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출전 경기였다.

그 경기서 난 4타수2안타를 때려냈고 이후 1년 내내 3번타자를 놓치지 않았다. 경주고등학교는 그해
대통령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보잘 것 없던 소년이 말이다.

그해 난 전국 타율 2위로 1년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회식자리. 난 동기들과 생애 처음으로 술을 마시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출처: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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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공포의 외인구단" 제작발표회장의 최익성(왼쪽)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연말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을 즈음, 최익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뭔가 준비하고
있는데상의할게 있어요."

또 도전? 슬몃 웃음이 나왔다. 현재 최익성의 직업은 배우다. 또 기업체 등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도 하고 있다.
이번엔 또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책을 내겠다고 했다. 여기까진 크게 놀라지 않았다. 7번(팀은 6개)의 이적과 끊임없는 도전.
그의 도전의 마지막 즈음엔 몇차례 출판제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획을 들으며 조금씩 고개를 가로젓게 됐다. 그냥 책을 내지는 않겠다는 것이 아닌가.

출판사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자신이 스스로 책을 만들겠다고 했다. 몇몇 출판사를 만나며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보통 출판사의 제의로 제작에 들어가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것 외엔 없다. 어지간한 이름값이 아니면
제목도 스스로 정하지 못한다. 내용도 바뀌기 십상이다. 대신 작가에겐 인세가 돌아간다.

남는게 많지는 않아도 훨씬 편한 길이다. 돈을 좀 벌어볼 심산이라면 마케팅 능력을 지닌 유명 출판사를 구하는
 길이 빠르다.

최익성은 이런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했다. 내용에까지 손을 대려 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실패로 끝난
 야구 선수의 파란만장한 삶'만을 팔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에게 출판 제의를 했던 회사들은 그의 실패에 초점을 두려 했다. 감성에 호소하겠다는 뜻이다. 그런 책이되면
야구나 인생 이야기보다 그 뒷 이야기, 여자나 술, 약물 등등이 주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익성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삶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에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책을 (자비로)스스로 제작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투자를 구하지도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돈으로 시작하고 끝을 볼 계획이다.

최익성이 꿈꾸는 책은 일종의 자기 계발서였다. 한참 이야기를 듣다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성공한게 없잖아요. 자기 계발서라 하면 보통 성공한 인물이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이야기로 꾸며져야
할텐데…."

최익성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 그렇게 얘기해요. 하지만 난 아직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아직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잖아요. 나처럼 많이 좌절해 본 사람도 많지 않을걸요. 그래도 내가
왜 여전히 싸우고 있는지 얘기하고 싶어요. 많은 사람이 공감하지 않을 수는 있겠죠. 그래도 단 한사람, 나아가서
 세상의 1%만이라도 날 이해할 수 있으면 돼요.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최익성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편견의 벽'에 막혀야 했던 선수다. 그는 전혀 교과서적이지 않은
타격폼을 지닌 선수였다. 독학으로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그를 믿어주는 지도자를 만났을 땐 꽃이 필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의 눈엔 '고집쟁이'로 비칠 뿐이었다.

수없이 타격폼을 바꾸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최익성은 듣지 않았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고 했다. 자신만의 분명한
 이유도 갖고 있었다.

최익성과 비슷한 경우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지도자의 지시대로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눈 밖에 나게 되고, 이런 선수들은 기회를 잡지 못해 결국 사라져버리게 된다.

최익성이 남다른 건 그 다음부터다. 최익성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시 같은 상황이 와도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려 노력하겠다고 자신했다.

최익성은 "사회에 나와보니 나처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부당하게 느껴지는 요구에
순응해야 하고
, 그러지 않으면 떠돌이가 돼야 하고. 세상엔 저니맨이 나 하나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난 그 과정에서 많은 걸
배웠어요. 그때 배운 것들이 다음 도전을 하는 힘이 됐구요. 그래서 난 아직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책 제목도 정해놓았다. '저니맨'. 최익성의 별명이다. 그가 이 제목에 집착하는 이유는 또 있다.
자신은 여전히 긴 여행 중이라는 의미에서다. 하긴, 아직 여행이 끝나지 않았는데 누가 실패와 성공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최익성은 절친한 후배인 이승엽을 만난 이야기를 해줬다. 이승엽은 책을 내겠다는 그에게 "내가 살면서 형 처럼
100% 자신감을 잃지 않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나이 40이라면 더 그렇죠"라고 했단다.

이데일리 SPN은 그런 최익성의 이야기 조금 먼저 들여다보기로 했다. 아직 가다듬어지지 않은 원고지만
그가 하고 싶다던 말이 무엇인지 자못 궁금했던 탓이다.
 
이메일도 보내지 못하는 컴맹 최익성. 그는 손가락 두개로 A4용지 80여장에 빼곡히 자신의 이야기를 적어냈다.
무슨 말이 그리 절실하게 하고 싶었을까.


 


Posted by 카이사르21

얼마전 고향 선배로부터 전화 한통이 왔다.
"너 야구선수  최익성 아냐?"
야구보다 축구를 더 좋아해 야구선수 이름은 잘 모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이였다..
  "2009 공포의 외인구단" 이라는 드라마에도 나왔고  지금은 연기자로서 새로운 인생을 준비한다고 했다.
한 때 유명한 프로야구 선수 였다기에 그런 사람이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알고 봤더니 최익성 선수도 나와 같은 경주가 고향인 사람이고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1년 선배라고 하니 한 번 만나 보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  허름한 호프집에서 고향 선배와 최익성  그리고 나..
호프를 마시며 밤이 늦도록 이런 이야기를 하며 그의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다.

별명이 저니맨 이였다고 했다
이 구단 저 구단  거의 모든 구단을 떠돌아 다녔다고 한다.
한 때 연습생 신화라 불릴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는데  잦은 부상과  불운...
결과적으로는  그리 성공적인 야구인생은 아니였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안타까울 정도 였다..

그러나 그를 통해 나를 돌아 보게 되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없이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전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최익성 선배는  2월경에 책을 출판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위 사람들이 니가 무슨 책을 쓰냐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이미 가시권에 들어 왔다....
내가 전산쪽 일을 하고 있는지라   블로그 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출판에 필요한  이것 저것 부탁하는 것을  도와 주고 있다..

 얼마전부터   이데일리에 그의 이야기가  연재 되기  시작하였다..
책이 나오기전 그의 이야기가   연재로 나온 것이다..
드라마와도 같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의 이야기 속으로~~~

Posted by 카이사르21
공장 청소부로 시작하여 초정밀분야 한국 최고의 명장이 된 사람!
초등학교 과정의 학력으로 5개 국어를 구사하며 대학을 졸업한 사람,
62개 초정밀부품의 국산화를 이룬 사람, 춘향가를 완창하는 사람,
기업체와 수많은 교육기관의 초빙 1순위,IBM에 강연요청받으면서 지게차 100대를 판 사람.....

그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수없이 많고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것이 없지만
동보북스닷컴의 기자에겐 하루 세시간 자면서 하루 일곱시간 책을 읽는다는 그의 생활습관이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
하루 세시간 자면서 하루에 일곱시간 독서를 한다니...
“비결이 있습니더. 하루에 세시간만 자도 깊은 수면을 취하고 말끔히 피곤을 풀 수 있는 방법을 내가 개발했지예.
내 책에 보면 다 나와있습니더.”
돈은 저 축할 수 있지만 시간을 저축할 수는 없다는 말이 있지만 그에겐 시간도 저축 가능한 일인 듯하다.
목숨 걸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신념 하나가 시간마저 저축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루 세시간 자고 하루 일곱시간씩 책을 읽는다면 시간을 저축하며 사는 사람이라 할 만 하지 않을까!

내가 아무리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학력이었다지만 생각해 보이소.
일년가야 책 한권 제대로 안 읽는 놈이 이기겠나 하루에 일곱시간씩 책읽는 놈이 이기겠나.
당연히 책읽는 놈이 이기는 기라니까요.”

김규환 명장의 독서는 기계 사용설명서를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기술관련서적, 훌륭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나 위인전, 문학작품과 역사물을 비롯해 지금까지 만여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독서한 그가 세상에 내 놓은 책은 어려운 기술서도 아니고 문학작품도 아닌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담은 일종의 수기같은 것이었다.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9전10기 끝에 운전면허를 땄을 때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국가기술 1급 자격증을 획득했을 때도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대학졸업장과 우등공로상 메달을 받았을 때도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명인명장이 되었을 때도 “어머니 저는 해냈어요”
그렇게 일기에 썼던 것이 책 제목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매순간 목숨을 걸며 노력을 기울여 25년간 이루어 온 것을 다 헤아리는 것도 힘들 지경이 된 김규환.
이렇게 이루고도 앞으로도 또 이뤄야 할 것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저의 앞으로 목표는 비밀이지만(?) 무동력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는 것입니다.”
김규환 명장이 목숨걸고 노력한다는데 무동력 대체 에너지 개발은 시간 문제다.
머지않아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할 김규환 명장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사진 촬영을 하는데..

“어? 고거 희한하게 생겼네? 그거 어디꺼예요?”
 이 디지털 카메라요? 일젠데?

“뭐라고요? 일제? 나 일본 제일 싫어요. 우리나라는 그런 카메라 못 만든답니까?
오늘이 광복절인데... 일제 쓰지 마세요. 무조건 우리가 일본보다 잘 살아야 돼요.”

일본인의 제안 제도를 부러워하면서도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잘 사는 건 질색이라는 김규환 명장.
그에게 어린 시절의 한이 오늘의 영광까지 올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듯이 우리 민족의 숱한 한도 김규환 명장처럼
멋지게 극복되어 세계 최고로 우뚝 설 수 있는 민족적 에너지로 승화 될 수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우지간 메이드 인 대한민국이 많이 나와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사람들이 각자 일하는 분야에서 세계1등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다 사람이 하는 일 아닙니까. 준비하고 노력합시다.” - 김규환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