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기본기가 부족하다." 최익성(38)이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귀에 못이
 박히 듯 들어야 했던 이야기다.

실제로 그랬다. 최익성의 스윙은 전혀 교과서적이지 않았다. 결국 그의 거친 스윙은 그가
여려 팀을 전전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됐다.

그 출발점은 늦은 야구 입문 탓이었다. 최익성이 야구를 처음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그나마 부상 탓에 3학년이 된 뒤에야 본격적으로 배트를 잡게 됐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많게는 6년 이상 뒤떨어진 출발이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걸림돌이 된다.

우리는 '야구 천재'하면 이종범(KIA)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SK 선수들은 "박재상"이라고 답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박재상이 중학교 2학년때 야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 선수는 "중학교 3학년때 야구 해서 프로 선수가 됐다는 건 중3때까지 한글만 겨우 깨우쳤던
아이가 갑자기 공부 시작해 박사 된거나 다름없다"고 그 차이를 설명해주었다.

어쩌면 야구 선수 최익성은 '고난'을 예고하며 첫 발을 뗀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첫 출발을
이렇게 적고 있다.

제법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난, 겁많고 소심한 전형적인 외동아들이었다. 중학교 1학년, 아버지 생신이었다.
갑자기 내게 물으셨다. "익성아, 너 야구 안할래?" 그땐 그 말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을 거란걸 알지 못했다.

두려웠다. 그러나 "넌 늦게 시작해도 될 것 같아. 발이 빠르니까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있어"라는 아버지 말씀에 나도 모르게 "네"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아버진 뛸 듯이 기뻐하셨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엔 야구부가 없었다. 그땐 같은 시내로 전학이 안됐다.
어쩔 수 없이 버스로 1시간 거리인 양북 중학교로 전학했고 몇달 뒤 야구부가 있는 경주 중학교로 다시 옮겼다.

막상 야구 선수가 됐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기본을 배우지도 못했고 덩치(당시 162cm 정도)도
 작았다. 다른 애들은 초등학교부터 배웠던 것을 뒤늦게 따라잡으려니 벅찰 수 밖에 없었다.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혔던 부상은 그때부터 내 발목을 잡았다. 친구와 목욕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난 친구 자전거의 뒷자리에 타고 있었다.

그러다 친구의 운전 부주의로 뒤로 나가떨어지며 오른 어깨가 박살나며 기절하고 말았다. 어깨 골절 진단.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난, 그 길로 야구부 숙소에서 나와 몇달간 또 집에서 보내야 했다.

부상에서 회복된 뒤에는 미친듯이 땀을 흘렸다. 내 훈련은 팀 훈련이 끝난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팀 훈련 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물 주전자를 나르는 것 뿐이었다.

다행히 아버지(전 경북야구협회 전무이사)의 제자가 감독님이셔서 홀로 특훈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3학년때는 제법 경기도 나가며 나름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더 큰 벽에 부딪혔다. 기량 차이는 더 커졌다. 야간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또 자전거 사고를 당해 이번엔 손목을 다쳤다.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1년을 보냈다. 어느날, 술 취해 돌아온 아버지가 날 불렀다.

"익성아, 야구 힘들면 안해도 된다. 너희 학교 야구 부장(아버지 후배)을 만났는데 안 시키는 게 좋겠다고 하더라.
 내 아들이 야구 선수로 실패하는 건 보기 힘들다더라."

한참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내 입이 열렸다. "아버지, 3학년때까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절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는 아들이 되진 않겠습니다."

아버지는 이제껏 내가 보았던 웃음 중 가장 환하게 웃으셨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한번 해봐라."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 온 난 미친듯이 훈련에만 전념했다. 너무 열심히 하려 했던 탓에 왕따가 될 정도였다.

단체 운동에선 단체 행동이 중요했던 때다. 당시 몇차례 숙소 이탈 사건이 있었다. 난 한번도 그 대열에
 동참하지 않았다. 동료들은 이후 날 대놓고 따돌렸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든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늘 건강하시던 분이셨는데…. 눈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울고만 있던 내게 떨리는 손을 간신히 드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구선수 우리 아들이 왔네." 이게
내가 들은 마지막 아버지의 말이었다.

난 이후 3~4시간만 자며 야구에 매달렸다. 중3때 담배를 피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이 약속은 여전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고3때까지는 당당한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6개월 뒤 건장하던 아버지는 뼈만 앙상해진 채로 돌아가셨다. 그 기간 동안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키는 10cm 이상 컸고 몸무게도 10kg 이상 불어났다. 난 확신했다. 아버지가 야구선수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나눠주고 가셨다는 것을.

그리고 또 내게 기회가 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기술을 따라잡지 못해 고생하고 있을 즈음,
박영진 감독님이 경주고등학교에 부임하셨다.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명성이 높던 분이셨다.

박 감독님의 첫 마디는 힘겹던 내게 희망의 빛이 됐다. "난 너희들을 모른다. 이제 내 앞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를 주전으로 쓸 것이다."

추운 겨울 밤, 난 이불속에서 나만의 사투를 벌였다. 그냥 따뜻한 방에서 누워있고 싶은 마음과 싸움이었다.
그러나 난 아버지와 약속을 지켜야 했다. 나 못지 않게 독했던 친구 천호광(현 계명대 교수)과 경쟁하 듯
훈련에 매진했다.

하루는 직접 감독님을 찾아가 매를 때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다. 나보다 잘하는 동료들은 매일같이
 감독님게 맞았지만 유독 난 때리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하는 선수를 쓰겠다'던 감독님 말씀만 철썩같이 믿고 난 훈련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날, 감독님이 날
 부르시더니 "1루수 할 수 있겠어?"라고 물으셨다. 두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며칠 뒤 연습경기를 앞두고 스타팅 라인업이 불리는 순간, "3번타자 최익성"이란 믿을 수 없는 한마디를
듣게 됐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출전 경기였다.

그 경기서 난 4타수2안타를 때려냈고 이후 1년 내내 3번타자를 놓치지 않았다. 경주고등학교는 그해
대통령기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난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불과 몇개월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던 보잘 것 없던 소년이 말이다.

그해 난 전국 타율 2위로 1년을 마쳤다. 그리고 마지막 회식자리. 난 동기들과 생애 처음으로 술을 마시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출처: 이데일리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