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삼성 라이온즈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최익성이 LG 선수이던 지난 2000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왜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플레이를 하는 건가요."
프로야구 선수가 허슬 플레이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최익성은 사정이 좀 달랐다. 이미 온 몸이 부상이라고 할 만큼 크고 작은 부상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최익성은 좀처럼 몸을 사리지 않았다. 경기장에만 나서면 공을 향해 몸을 던지고 굴렀다.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최익성의 답은 간단했다. "난 원래 그렇게밖에 할 줄 몰라요. 한번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를 기대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최익성은 그랬다. 늘 절박하게 야구를 했다. 남보다 늦은 출발을 하고도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었다.

꿈같은 고3시절을 지나 경주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계명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아버지의 절친한 후배이자 계명대 감독이시던 김충영 감독님은 날 볼때마다 이런 농담을 하셨다.
"넌 흐리멍텅하고 약해서 야구 선수가 될 수 없어." 난 그런 김 감독님의 인정을 받아 당당해게 내 실력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내게 주어진 미션은 1학년부터 주전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대학 입학 후 난 다시 좌익수를 맡게됐다. 그때 계명대 좌익수는 1년 선배가 맡고 있었다.
그 선배는 1학년때부터 4번타자를 맡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갖고 있었다. 내 목표는 그 선배를 제치고 주전 좌익수를 맡는 것이었다.
하루는 테니스부의 절친한 선배에게 내 꿈을 이야기했더니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웃었다.
난 자신 있었다.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조금만 방심하면 승부는 결정날 것이다. 그리고 늘 그랬던 것 처럼 매일 밤 홀로 두배의 훈련량을 소화해냈다.
난 나 자신과 싸움에 능했다. 내 몸은 내 정신을 이기지 못한다. 그렇게 첫번째 겨울을 보냈다.
기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규 시즌이 시작되기 전, 고등학교 팀과 연습경기가 있었다. 난 대타로 나서 볼넷으로 진루했다.
1루로 나간 뒤에는 일부러 리드를 무리하게 잡았다. 투수의 견제가 날아왔고 난 몸을 날려 1루에 슬라이딩을 했다. 투수는 그렇게 3번 정도를 반복하고 나서야 타자와 승부를 했다.
경기 후 감독님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익성이를 봐라. 고등학생과 경기서도 몸을 아끼지 않는 플레이를 하지 않느냐."
내게 상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맘 속엔 이미 고등학생과 경기가 아니었다. 주어진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결국 난 1학년때부터 계명대의 주전 좌익수가 될 수 있었다. 거기에 4번타자였다. 난 슬쩍 내게 미소를 보냈다.
다음 목표가 생겼다.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훈련량을 더 늘리는 것 만이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모든 훈련이 끝난 뒤 야간 개인 훈련에만 매일 1천개의 스윙을 했다.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나와의 싸움.
아무도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만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 별들에게 말을 거는 버릇이 생겼다. "네가 위에서 날 보고 있었으니 나중에 증언을 해줘. 그리고 꼭 내가 힘들때 (그때 이야기를 해주며) 내게 힘이 되어줘."
그러나 오래지 않아 또 한번 고난이 찾아온다. 3학년 무렵, 허리 디스크가 온 것이다. 다리를 올릴 수도, 편하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병원에선 야구는 무리라고 했었다.
난 개의치 않았다. 운동선수는 누구나 부상을 당한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1년을 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맞이한 4학년. 부상은 완전히 낫지 않았고 결국 많은 경기를 나설 수 없었다. 타율도 겨우 1할이 넘는 수준에서 끝났다.
국가대표는 커녕 프로팀 지명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잠시 좌절하고 있을 때 삼성에서 테스트 제의가 왔다. 1,2학년 때부터 날 유심히 지켜보며 한때 1차 지명까지도 고려했었다는 말을 들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동봉철 양준혁 김태한 등 기라성같은 선배들의 도움도 있었다고 들었다.
타격은 생각보다 형편없었다. 너무 오랜 공백이 있었던 탓이다. 대신 주력이 살아 있었다. 난 2군에서 가장 빠르던 선수와 단거리 대결에서 이겼다. 코치님들은 놀라워하며 웃으셨고, 그렇게 입단이 결정됐다.
다음 목표가 생긴 것이다. 어떻게든 1군 한 경기만 뛰자. 유명한 선수가 된다거나 좋은 성적을 낸다는 생각은 없었다. 삼성에서 딱 한경기만 1군에서 뛰어보자. 연습생 최익성이 품은 또 다른 꿈이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때부터 내 거친 타격폼이 문제가 됐다. 코치님들의 인정을 받기 어려웠다. 부상 공백을 메우는 일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10개월이었다. 아무리 훈련해도 차이가 좁혀지지 않는 듯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김용철 타격 코치님이 이런 제의를 하셨다. "넌, 발이 빠르니까 좌타자를 해보는게 어떻겠냐."
이것 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코치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매일 새벽 특훈을 시켜달라는 조건을 붙였다.
그러나 좌타자 변신 역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난 한가지만 생각했다. 좌타자로 기본기를 익히다보면 분명 우타자로서 길이 보일 것이다.
때문에 또 이중 생활이 시작됐다. 정규 훈련 시간엔 좌타자 훈련, 밤에는 나만의 우타자 특훈이 이어졌다. 홀로 내 스윙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어느덧 봄이 왔고 연습 경기의 시절이 찾아왔다. 그러나 봄 바람은 내게 남은 시간이 더 줄어들었음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 즈음, 이상한 자신감이 날 감싸고 있었다. 오른쪽 스윙에서 무언가가 찾아온 것이었다. 바로 코치님을 찾아갔다. "저 오른쪽, 오른쪽이 자신있습니다."
좌타자로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금방 허락이 떨어졌다. 당시 삼성은 최강의 멤버였다. 이만수 강기웅 김용국 양준혁 선배등의 1군만이 아니었다. 2군에도 국가대표 출신 억대 몸값들이 즐비했다.
2군에서도 경기에 나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즌이 개막되었지만 난 2군서도 벤치 멤버였다.
포기하지 않았다. 대주자가 전부였지만 몸을 날리며 내 몫을 하려 애썼다.
기회는 비와 함께 찾아왔다. 비 때문에 2군 경기가 취소돼 대구로 돌아온 뒤 영남대와 연습경기가 잡혔다. 주축 선수들이 쉬었던 덕에 내가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그날도 1루에만 나가면 슬라이딩을 반복하며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내게 대학생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때 투수가 이후 삼성 후배로 들어온 전병호였다.
경기 후 김 충 2군 감독님이 선수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4년여 전 들었던 그 말이 또 들려왔다.
"너희들 익성이 플레이 봤냐. 혼자 열심히 하는거 봤느냐고. 비오고 대학생이라고 대충 하려했던 건 아닌지 반성해 봐."
다음날, 난 8번 지명타자에 이름을 올려놓게 됐다. 축하 반, 비웃음 반의 농담이 여기 저기서 들려왔다.
"너, 감독님하고 계좌 텄냐." "위장오더 아닐까." , "오늘 비 오겠구나." 등등.
난 물러설 수 없었다. 하늘도 내편이라 믿었기에 두려움도 없었다. 난 그날 5타수 5안타를 때려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삼성 2군의 1번타자가 됐다.
 
출처: 이데일리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