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로마의 군인, 정치인)-

유명한 카이사르 연구가 존 H. 콜린스(Jhon H. Collins)는 카이사르를 알면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기전 아르바이트와 독서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때 나와 항상 함께 했던 책은 "로마인 이야기"였다.
로마인 이야기는 일년에 한권씩 출판 되는 '시오노나나미'의 야심작이다.
역사책 이라기보다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역사 이야기에 가깝다.
이 책을 읽다보면 검은색 활자가 만화책 보다 훨씬 더 흥미로울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로마인 이야기중 가장 두꺼운 4,5권은 모두 카이사르에 대한 이야기다.
두권을 다 읽고 나서야 카이사르가 왜 그토록 비중있게 다뤄졌는지 알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기 이익 때문에 양심과 자존심을 팔고 굽신거리는 짓을 지극히 싫어했다.
그렇다고 거만하거나 상대를 업신 여기며 무시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전쟁에서 잡힌 포로를 불러 놓고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 본다.
그래서 그 포로가 고국으로 돌아 가고 싶어하면 먹을 것을 주고 아무말 없이 돌려 보내 주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카이사르 군대의 병사가 되길 원했다.
카이사르 부대의 병사가 되는 것은 그시대 남자들의 최대 자부심이였다.
한번은 카이사르와 10년을 넘게 목숨걸고 싸웠던 최정예 병사들이 파업을 하였다.
로마의 군대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만이 정예부대원이 될수 있는 명예로운 직업이였다.
적군의 포로까지 존중하고 평등한 기회를 준 카이사르에게 서운함을 느낀 로마병사들이 전쟁을 못하겠다며 고향으로 돌려 보내줄것을 요구했다.
성난 병사들이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며 참모들은 말렸지만 카이사르는 직접 로마 병사들이 소란을 일이키는 곳으로 걸어갔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자신들의 영웅 카이사르가 혼자서 걸어오자 모두들 봉급인상과 처우 개선을 기대하며 카이사르의 말에 귀를 귀우렸다.
카이사르는 간단한 한마디를 한다.
" 로마시민들이여! 그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그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바입니다. 그대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카이사르가 연설 할때의 첫마디는 '형제들이여!' 였다
그러나 그들이 로마 시민이 되는 순간 더이상 카이사르의 병사가 아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후 모두들 울부짖으며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다.
다시 카이사르의 병사가 되게 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카이사르는 적은 물론 자신을 죽이려는 정치적인 정적에게도 관대하게 대했고
그들과 똑같이 헐뜯고 비판하는 옹졸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비판과 모략이 있을때마다 "내가 나의 신념에 충실하며 살듯 상대도 그럴 권리가 있다"며 오히려 주변 사람을 설득하고 달랬다.
그것이 가능했던것은 카이사르의 합리적인 이성과 인격, 그리고 자신에 대한 당당함과 자부심 때문이였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그당시 최고의 변호사 키케로가 인정하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이였다.


- 주영(기업가) -
60년대 말. 당시 한국의 최대 선박건조능력은 103백톤, 최대 건조실적은 미국에서 수주한 17천톤짜리가 전부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주영은 수십만톤 규모의 조선소를 건립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착수했다.
정주영 71년 조선소 사업계획서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 1장만을 들고 영국 런던으로 차관을 얻기 위해 떠났다.
문제는 돈이었다. 배 한 척 만든 경험이 없는 현대에 엄청만 금액의 차관을 쉽게 제공해 줄 은행을 찾기가 쉽지 않았으나 결국 런던의 바클레이스 은행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5백원짜리 지페에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정주영은 그자리에서 5백원짜리 지페를 보여주며 우리 선조들은 세계최초로 철갑선을 만든 우수한 민족임을 강조하며 설득했던 것이다.
또 영국 정부기관인 수출보증국의 승인을 얻기 위해 조선소도 없이 선박을 수주하는 모험을 감행해서 그리스 선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조선소 착공과 동시에 26만톤급 유조선 2척을 건조하는 세계 조선사상 유례가 없는 신화를 이룩했다.
배를 만들수 있는 조선소도 없이 배를 수출하는 계약까지 따낸 것이다.


- 김규환(기술 명장) -
가공 시 1℃ 변할 때 쇠가 얼마나 변하는지 아는 사람은 김규환씨밖에 없다.
김규환씨는 이것을 알려고 국내 모든 자료실을 찾아봤지만 아무런 자료도 없었다.
그래서 공장 바닥에 모포깔고 2 6개월을 연구했다.
재질, 모형, 종류, 기종별로 X-bar값을 구해 1℃ 변할 때 얼마 변하는지
온도치수가공조견표를 만들었다.
기술공유를 위해 이를 산업인력관리공단의기술시대란 책에 기고했다.
그러나 실리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후 3명의 공무원이 찾아왔다.
처음에 회사에서는 큰일이 일어난 줄 알고 난리가 났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출한 자료가 기계가공의 대혁명 자료인 걸 알고 논문집에 실을 경우 일본에서 알게 될까 봐, 노동부장관이 직접 모셔오라고 했다.
이것이 발간되면 일본에서 가지고 갈 지 모르는 엄청난 것이였다.
26개월동안 집에는 두번만 갔다. 휴가는 김규환씨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명절날 잠시 집에가서 차례를 지내고 곧바로 공장으로 돌아왔다.
이런한 집념과 무서운 노력이 그를 세계적인 기술명장으로 만든 것이다.

-함신익(지휘가)-
그 명성에 비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지휘자가 있다.
40대 젊은 지휘자 함신익 씨는 미 예일대 지휘 교수.예일대심포니 상임지휘자.
텍사스 에벌린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미국에서 명성이 더 화려하다.
2002 8월에는 텍사스의 에벌린시가 `함신익의 날` 을 선포해 그의 음악을 기리기도 했다
학창시절 이스트만 음대 대학원에 들어간 함신익은 그 곳에서 이른바 `이스트만의 함신익 전설` 을 만들어 냈다.
교과과정 중에 실제로 지휘봉을 잡고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1주일에 20분 정도 밖에 안되자 스스로 개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음악감독인 제임스 레바인이 줄리아드음대에 다닐 때 자신과 똑같은 고민 때문에 개인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그를 본떴다.
함신익은 이스트만 학생들 중에서 연주 실력이 괜찮은 사람들을 골라 그들을 주말에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나는 한국에서 온 함신익이다. 언젠가는 세계적인 지휘자가 될 것이다. 우리 집에 오면 한국식 뷔페가 기다리고 있다.
음식을 들면서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하자. "
함신익이 그들에게 한 초청의 변이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성가대 시절 만나 결혼한 아내와 함께 금요일 밤을 꼬박 새우며 만두.잡채.볶음밥 따위를 만들어 그들을 기다렸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국 음식의 맛과 함신익의 열정에 매료된 그들은 곧 15인조 오케스트라를 구성했고 이 오케스트라는 이후 4년 뒤에는 90인조로 성장했다.
나중에는 서로 들어오려는 사람들 때문에 오디션을 봐야 했다.
그의 정열에 감동한 학교측은 당시 일반 연주단체와의 1년 임대료가 50만달러에 달하는 홀을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던 학교도 함신익에게 월터 헤이건 상이라는 지휘자상을 수여했다.

건전한 자부심, 강인한 신념과 확신, 그리고 진취적인 행동력!
이런 것들이 삶의 미덕 인지는 잘 모르지만 불가능을 가능케하고 목표를 성취하게 하고 삶을 멋있게 가꾸는데 있어서는 꼭 필요한 요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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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