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자기계발2017. 2. 5. 01:44

영화 "명량"의 누적관객수가 1700만명을 돌파했다. 
1년에 영화 한 편이라도 보는 사람이면 다 봤다는 소리다.
이 정도면 이순신 신드롬이라 할만하다.

영화 "명량"은 잘 만든 영화임은 분명하지만 명작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상상력이 가미 되었다지만  선악구도를 만들기 위한 "배설" 장군의 비겁자 설정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고 백병전은 허구에 가깝다.
이순신 함대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함포사격으로 접근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백병전은 없다시피 했다.
뻔한 스토리 , 다소 억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을 보면 이 시대 사람들이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많이도 그리운 모양이다.

그때 상황을 생각해보자.
당시 일본 해군은 그냥 해적 스타일이다.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해적 배는 날렵하고 빠른게 최우선이다.
타겟을 발견하면 재빠르게 접근해서 갈고리를 배에 걸고 배 위로 기어 올라 백병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술이 일반적이다. 
반면, 고려시대부터  왜구의 노략질에 대비 해야 했던 조선의 전함은  해적이 못 기어 오르도록 배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 접근 자체를 못하게 하기 위해 함포전에 용이한 형태로 발전 시켰다. 
배 양 옆으로 수 십개의 함포를 배치 했고, 포격의 충격을 상쇄하고 그 자리에서 360도 회전하여 연속 포격을 하기 용이하게 배 밑바닥을 평평하게했다. 
일본의 배는 함포가 아예 없거나 앞쪽에 1~2개가 고작이였지만 조선의 판옥선은 24개 이상의 함포가 있었다. 
높은 곳에서 막강한 화력으로  일제 사격, 연속 사격이 가능한 조선 함대는 일본 함대보다 월등히 앞섰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명량대첩을 바라 보자.
무패신화 이순신은 그 누구보다 전략적인 사고를 하는 인물이였다. 
이순신이  명량에서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임한 것은 객기를 부린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왜적의 배가 333척이라는 말은 후대에 쓰인 기록으로 명백한 허구고.. 당대 기록인 난중일기, 징비록을 근거로  하면 130여척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척대 130척.. 여전히 숫자만으로 보면 일본 함대가 10배가 넘는다. 

하지만 화력으로 보면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함대의 화력이 월등히 앞선다.
넓은 바다에서 만나면 12척이 포위 당하지만 명량의 좁은 길목에서 상대하면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로 일본 함대를 충분히 각개격파 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순신은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전투에 임했음이 틀림 없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이순신 대장선만 돌격앞으로 하고  나머지 배는 겁에 질려 멀치감치 있었다. 
이 상황도  이순신이 지휘하는 대장선 1척과  왜선 130척이 동시에 싸운것이 아니라 울돌목 좁은 해로에서 이순신 전함 1척과 10여척의 일본 전함이 싸웠다고 봐야 한다..
이순신 전함은 1척이지만 동시에 십 여대문의 함포가 불을 뿜고 배를  360도 돌려 가면서 연속 사격이 가능했기에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이순신의 위대함이 경감 되는 것 같아 망설여지긴 하지만 
명량에서 이순신이 왜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신출귀몰한 전략의 힘이라기 보다 압도적인 화력의 우위를 잘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신드롬이 자칫 이순신을 불가능을 가능케한 신비한 인물로 포장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는 이순신의 위대함을 드높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깍아 내리는 것이다. 
인간은 신이 되는 순간 위대함이 별다른 감동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위대함을 좀더 다른 각도로 바라보자.
그의 일대기를 추적하다보면 놀랍도록 상황을 주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은 백의종군을 두 번이나 당한다.
한 번은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육군에 근무할 때고 ,한번은  잘 알려진 임진왜란 중이다. 
사유는 두 번 다 명령불복종이다. 
자신의 판단에 " 이것은 아니다"  싶으면 직속 상관은 물론이고 왕의 명령까지 거리낌없이 거역하기까지 한다.

이런 모습이 독불장군처럼 보이고, 융통성이 없고  대인관계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마지못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현장 총사령관인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싸우라 마라 참견하지 말라는 것이다.

칠철량 전투에서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이 욕먹는 이유는 총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녔다는 것이다.
자신이 판단하기에 싸워야 할 타이밍이 아닌데도  선조가 싸우라고 제촉하고 직속상관인 권율이 곤장을 치며 싸우라고 다그치자  싸우면 안 되는줄 알면서도 마지못해 싸우다 전멸 당했다.
이순신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이순신 같았으면 아니다 싶으면 곤장을 맞고 계급장 떼이고 이등병으로 강등당한다 해도 절대 싸우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순신이 무패신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용맹과 전략,  압도적인  조선수군의 화력의 역할도 컸지만 언제나 상황을 주도하는 출중한 능력 때문이다.


이순신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전투만 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전투는 왕의 말도 듣지 않았고 옆에서 지원군을  보내 달라고 아우성을 쳐도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또한 적군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대응 한 것이 아니라 기습을 하여 선빵을 날리거나, 적을 유인해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 전투를 했다.  
이렇듯 그의 삶도 그의 전투도 언제나  그가 상황을 주도했다.


스티븐코비의 "성공하는 사람의 7가지습관"에 가장 먼저 나오는 성공습관은 주도적인 삶이다.  
주도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외부 요인에 의해 그 삶이 휘둘리지 않는다. 
마지못해  , 눈치를 보며  억지로 끌려다니지 않는다.

갑자기 실직을 해도,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해도,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느닷없이 이별통보를 받아도 크게 요동하지 않는다.
외부 요인에 그저 담담할 뿐이다. 

이순신이 그러한 삶을 살았다. 그 누구보다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고 기구한 삶을 살았다.
큰 공을 세우고도 누명을 쓰고 모함을 당했다. 백의종군에 온갓 수모를 겪은뒤  다시 3도수군통제사가 됐지만 수하의 병사는 몇명 되지도 않았다.
그 상황에서 왕에게 서운함을 느껴  삐지지도 않고 누굴 원망하지도 않았다. 
언제나 담담했고  현 상황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최선의 일인지만 생각했다.
그랬기 때문에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각 지역을 돌아 다니며 패잔명을 끌어 모으고, 쓰다버린 무기와 도망친 배를 수습해 다시 수군을 재건하고 불패신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순신이  진정 위대한 이유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과 신출귀몰한 지략이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도적인 삶의 키를 놓지 않는  근성이다.

그의 죽음 조차도 완벽히 주도적이다.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 조.명 연합군의 압도적인 화력앞에 일본군은 도망가기 바빴다. 
그 어느 전투보다 승률이 높았고 누가봐도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전투였다.
이쯤되면  총 사령관은 맨 뒤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게 맞다.

하지만  이순신은 실질적인 자살을 선택한다.

갑옷을 입지도 않은채  최선봉에서 전투를 지휘하다 적의 총탄에 맞았다. 
명백한 자살이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게 아니라 그냥 죽기를 원했다고 봐야한다.
전쟁이 끝나면 백성에게 추앙을 받는 자신은  백성의 원성을 받는 선조에서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할 것임이 분명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당대 최고의 전략가, 언제나 상황을 주도한 승부사 이순신은 역적으로 몰려 험한 꼴을 당할바에야 차라리 장열하게 전사하는 모습으로 자살을 택해 영웅으로 남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이 부활해  이 시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주도적인 삶을 살아라" 가 아닐까 싶다


경청 하되  휘둘리지 말것!
존중 하되 질질 끌려 다니지 말것!
나의 결정은  언제나 나의 판단에 의한 것임을 잊지 말것..

그러므로 언제나 내 삶의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고  누굴 원망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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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