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스피노자


한국을 빛낸 두 장인, 진창현 씨와 전용복 씨. 그들은 각각 바이올린 제작과 옻칠에서 장인의 예술 혼을 불살랐다.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인 진창현 씨가 바이올린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들은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에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은 현대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그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자, 진창현 씨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문전 박대를 당하자, 바이올린 공장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해서 하나 둘씩 배워 나갔다. 그렇게 배운 방법으로 그는 바이올린을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한 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밥 먹는 일도, 잠자는 일도 잊고 미친 듯이 바이올린에만 매달렸다.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땀 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 경연대회’에서 여섯 개 부문 가운데 무려 다섯 개 부분을 석권하는 쾌거를 올렸다. 또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 제작자로 인정받고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받았다.

옻칠 장인 전용복 씨는 일본의 유서 깊은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 복원 사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 일을 맡을 수만 있다면 일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업에 앞서 그는 다양한 옻칠 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전역의 유명한 옻칠 장인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할 사람을 결정하는 자리에 섰을 때, 전용복 씨는 브리핑을 끝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불가능하다고 한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 줄 아시오? 그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고, 나는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오. 아시겠소?”

결국 1조 원대의 엄청난 공사가 전용복 씨의 손에 떨어졌다. 옻칠이 10톤이나 소요되는 엄청난 작업 분량을 전용복 씨는 30여 명 가량의 인원만을 대동하고 진행했다. 그런데 마지막 6개월을 남겨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후반 작업을 도와 줄 한국 기술자들의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남은 작업을 30여 명이 마무리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지난 2년 6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온 작업을 일본인들 손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일은 두 개의 방에 금박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개관일이 다가오면서 기술자들은 피로에 지쳐 하나 둘 쓰러졌다. 작업은 결국 개관일 새벽 3시에 끝났다. 3년 동안의 복원 작업은 연인원 10만 명분에 해당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메구로가조엔의 복원은 그 해 일본의 가장 큰 뉴스였으며, 전용복 씨는 세계적인 칠예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출처 : Success Partner
Posted by 카이사르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