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5가를 지나가다 보면 장기두는 노인들이 많이 있다.
장기 두는 사람은 두명인데 주변을 둘러싸고 훈수두는 사람은 열명도 넘는다.
장기 두는 사람은 낑낑 거리는데 훈수 두는 사람들은 기가 막힌 작전을 쏟아 낸다.
그렇다. 장기 두는 것을 구경하면 장기 게임이 잘 보인다.
이상하리만큼 잘 보인다.
하지만 내가 직접 장기를 두면 상대가 무슨 꼼수를 쓰는지 잘 보이지 않고 실수를 연발하게 된다.
왜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그것은 게임에 참여하는 자와 게임은 보는 자의 시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축구 경기를 구경하는 사람은 누가 잘하고 못하는지 한눈에 알아본다.
국가대표 선수가 뛰는 모습을 보고도 답답하다고 한숨을 쉰다.
이 역시 마찬가지다.
게임을 관망하는 자의 시야는 게임 전체이고 양팀을 동시에 보기 때문에 잘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게임에 직접 참여하게 되면 내포지션에서 상대를 보기 때문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
시야가 좁아진 것이다.
시야가 좁아지면 전체 시야에서 바라보는 객관이 사라지고 내 주위만 보는 주관만 살아나게 된다.
객관을 보지 못하고 주관에 빠지면 조화를 깨버린다.
팀 플레이를 하지 못하고 개인기에 의존하면 강한 팀이 되지 못한다.
개인기가 아무리 뛰어난 축구 선수라도 시야가 좁아 게임을 읽는 눈이 없으면 훌륭한 개인기로 인해 팀을 망쳐 버린다.
그래서 기술 좋고 열심히 뛰고도 욕먹는 선수가 나오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삶의 시야를 넓혀 자기를 객관화해야 한다.
그래야 열심히 살고도 삶을 망치는 모순에서 벚어날 수 있다.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평가 받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가장 유명한 말 중 하나는 "보기 싫은 현실도 보라" 이다.
카이사르가 발견한 인간의 결함은 일종의 자기 페쇄성이다.
스스로 함정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객관화를 이뤄내야 한다.
자기 객관화를 이뤄내지 못하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인정하고 싶은 것만 인정하게 된다.
마치 시야가 좁은 축구 선수와 같고 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내패만 쳐다보는 어설픈 타짜와 같다.
삶의 실력이 뛰어날리 없다. 삶의 경쟁력이 좋을리 만무하다.
게임 전체를 읽고 자신의 위치를 잘 이해하는 선수가 적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킬패스를 잘 하듯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멋드러진 삶을 살아 갈 확률이 높아진다.
그런데 나를 위한 자기 객관화를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내가 내편이 되면 곤란하다.
게임 참여자로서의 포지션을 초월해서 게임 전체를 지켜보는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게임을 직접 뛰고 있는 축구 선수는 자기가 잘하고 있는 줄 알아도 감독이 볼때는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축구만 하더라도 자기 객관화가 매우 중요하다.
최소한 내가 무엇을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선수들의 수준을 한단계 레벨업 시킨 방법 역시 선수들에게 자기객관화 훈련을 시키는 것이였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가 끝나면 비디오 감독관인 고트비 코치를 시켜 경기 전체를 꼼꼼히 촬영하고 분석한 자료를 선수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플레이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게 했다.
경기가 끝나면 감독의 훈계를 듣고 끝내는 기존의 방식을 탈피해 선수 스스로가 자신이 뛰는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팀의 관점에서 자신의 플레이를 객관화 시켜서 조화로운 팀, 그래서 막강한 팀으로 담금질 해나갔던 것이다.
축구선수가 게임을 뛰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듯 분주한 삶 속에 정신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과 훈련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히딩크 감독이 선수들에게 경기를 뛰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했듯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하루에 30분 정도는 자신을 들여다 봐야 한다.
퇴근 시간에 일정한 거리를 걷든, 잠자기 전에 일기는 쓰든 이 시간만큼은 반드시 가져야 한다.
마치 바둑 대국을 마치면 하나씩 복기 해보듯이 하루의 삶을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져야 그 삶이 발전하게 된다.
자기를 뒤돌아 보는 시간을 갖는 것, 이것이 자기 객관화의 시작이다.
자기 객관화의 시간을 확보 했다면 자기를 바라보는 잣대도 있어야 한다.
삶에 대한 표준모형 즉, 어떤 삶을 살아야 겠다는 가치관, 무엇을 향해 나가고 있다는 방향성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가치있는 삶, 의미있는 삶, 보람있는 삶, 성취하는 삶, 태어난 보람이 있는 삶, 한 번 살아봄직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들여다 볼수 있게 된다.
이렇듯 매일 정해진 시간에 자신의 생활을 들여다 보며 삶의 표준모형에 맞게 살고 있는지 매일 들여다 보는 것은 일종의 생각의 프로세스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질서가 잡혀있는 생각은 잡생각이 아니라 사색이 된다.
프로세스가 잡혀 있는 생각이기 때문에 걱정하다 지치지 않고 , 엉뚱한 생각을 하다 방황하지 않고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다. 또한 정체는 삶이 아니라 진보하는 삶을 살게 된다.
자기 객관화는 어느날 문득 떠오르는 대로 한번 자신을 돌아본다고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규격화된 사색의 프로세스를 만들어 그 프로세스에 반복적으로 태워야 한다.
그래야 삶의 엔진이 갖춰진다. 또한 그 엔진에 발동이 걸리면 삶 속에 에너지가 나오고 비로서 경쟁력을 갖추게 되고 매일 성장하고 성숙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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