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일을 복잡하게 하지 말자
(Don't Complicate Matters)


 당신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자. 단순한 방법과 대답을 찾지 않는다면, 잘못 갈 수도 있다. 기본 원칙들에 충실하자. 시작하기 전에 업무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지 확인하자. 충분한 완수를 위해서 시간과 성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는가?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다시 점검해 보자. 그 일이 당신의 모든 시간을 빼앗는가? 당신이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가? 당신은 충분한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위임될 수는 없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완수되기에 올바른 사람에게 위임이 되었는가? 당신의 연구와 반성의 시간, 팀에의 위임, 우선 순위가 매겨진 할일 목록 모두가 도움이 될 수 있다.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버리자. 심지어는 이 행동 원칙(The Action Principles)도 매우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다. 당신 자신을 향상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돕자.


Don’t complicate your life. Think before you act. Look for the simple ways or answers first where less can go wrong. Work from your basics. Make sure that you understand the assignment or the problem before you begin. What are the time and performance expectations that will indicate satisfactory completion? Reexamine how you are doing things. Is a task consuming all of your time? Is it worth the time you are investing? Do you have the necessary resources? Can it be delegated? If so, is the right person assigned to complete the job? Your research, your quiet time, your commitment to teamwork and your prioritized to-do list should all help. Pare away the unnecessary. Even the philosophy underlying these Action Principles can be stated very simply. Improve yourself and help others.


출처:  www.succes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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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수 년 아니 수십년 동안 희망의 꽃나무에 물을 주며 살아왔을 수도 있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런 꿈을 꾸며 위안을 얻을 수도 있고,
살아가면서 좌절하고 용기가 꺾일 때 계속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
자신의 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을 수도 있다.
...

여러분의 머릿속에 미래에 대한 청사진이 완벽하게 들어 있든,
그저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있든
그 꿈을 현실로 옮기는 생의 2막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정의 내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꿈을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만 남도록 가지를 쳐내는 것이다.
나는 그런 과정을 "꿈 걸러내기"라고 부른다.

여기서 한가지, 한평생 자신의 꿈을 추구해 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경고한다.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에 오랫동안 전념해왔다고 해서
꿈 걸러내기 과정을 건너뛰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목표가 단 한가지만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가 평생을 통틀어 한가지 꿈만 추구하며 살아갈 수도 있지만 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다.
대학시절 꿈이었던 자기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몇 년 동안 계획을 세워왔다 하더라도
그 꿈에 매어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성장하고, 변하고, 배우면서 꿈과 희망 또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살 때의 정열이 50살까지 남아 있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 없듯이
어떤 일에 대한 정열이 변했음을 인정한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다.

- 스테판 M. 폴란 & 마크 레빈의 <2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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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이래도 안 뽑아 줄 겁니까.”
올해 초 셋톱박스 전문 업체 H사에 입사한 유 모씨(26)는 2차 면접 시험이 있는 날 아침 H사 사옥 앞에 나가 자신의 이름을 붙인 요구르트를 출근길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유흥업소의 홍보 도우미로 착각한 회사 경비원들의 저지로 불과 100여개를 돌리는데 그쳤지만,
요구르트를 받은 사람들 중엔 면접관도 있었고, 유 씨는 결국 입사에 성공했다.

사상 최악의 취업난을 뚫겠다는 구직자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면접관 앞에서는 물론이고 시험장 밖에서부터 눈도장을 받아 취업에 골인하려는 갖가지 아이디어가 백출하고 있다.

가전업체 D사에도 전설 같은 구직자들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면접 전날 ‘D사에서 꼭 일하고 싶습니다’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출퇴근길 직원 500여명에게 사탕을 돌린 김모(26)씨가
있는가 하면, 채용담당자 앞으로 동영상 메일을 보내 간곡한 취업 의지를 밝힌 취업준비생도 있었다.
20초 분량의 동영상에는 구두를 벗고 운동화를 들어보이며 “발로 뛰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외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자신을 ‘구직 매물’로 내놓은 사람도 있다.
32세의 이 청년은 지난 9월 A사이트에 “근면한 남성, 열심히 일하겠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이력서를 올렸는데, 경매 시작가는 1,000원, 즉시 구매가격 300만원으로 설정해 은근히 희망 급료를 제시하는 재치를 보였다.

구직을 향한 열정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S대 법대 출신으로 시가 총액 1,000억원대의 장외 기업을 운영했다는 박모(42)씨는 일간신문에 가로 8㎝, 세로 15㎝ 크기의 구직광고를 냈다.

그는 “사업이 부도나 2년간 옥살이를 했다”며 “기획능력이 뛰어나고 수익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도 있으니 입사만 하면 수개월 내 성과를 낼 수 있다”고 호소했다. “월급 대신 스톡옵션만 받고 일할 수도 있다”는 파격적인 조건도 덧붙였다.

튀는 사례의 하일라이트는 서울에서 울산까지 마라톤 레이스를 벌인 김모(28)씨. 서울에 사는 김씨는 지난해 12월 현대중공업 공채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하고 20여일 남은 발표일을 서울에 앉아 기다리지 않고 현대중공업 본사가 있는 울산까지 500㎞에 이르는 육로를 7일 밤낮에 걸쳐 뛰어 갔다.

그는 인사담당자에게 미리 이메일을 보내 “천 마디 말보다 한 번의 행동으로 현대중공업을 위해 달리겠다”며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갸륵한 정성을 보여 결국 취업문을 뚫었다.

-  어떤 일간지에 실린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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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1. 공은 여기서 멈춘다.(트루먼 대통령)
나는 내 과거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진다. 오늘날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정적으로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선택한 결단의 결과이다.

2. 나는 지혜를 찾아 나서겠다.(솔로몬 왕)
나의 과거는 결코 바꿀 수 없지만 오늘 내 행동을 바꿈으로써 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나는 오늘 당장 나의 행동을 바꾸겠다!

3. 나는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이다.(체임벌린 대령)
나는 빠르게 움직인다. 성공하는 사람은 재빨리 결정을 내리고 자신의 마음을 천천히 바꾼다.

4. 나는 결연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콜럼버스)
나에게는 꿈이 있다. 일단 꿈을 꾸어야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 꿈 없는 사람은 성취도 없다.

5.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하겠다.(안네 프랑크)
행복은 하나의 선택이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삶에 감사하겠다.

6. 나는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맞이하겠다.(링컨 대통령)
나는 나를 부당하게 비판한 사람들도 용서하겠다. 남은 물론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겠다.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 모든 착오, 모든 좌절까지도.

7.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겠다.(가브리엘 대천사)
나는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큰 힘, 즉 선택의 힘을 갖고 있다. 오늘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
Posted by 카이사르21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최익성은 2005년까지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했다. 이후 어떤 팀에도 속하지 못한 채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공식적으로 최익성이 은퇴한 해는 2005년이다.

그러나 최익성은 자신의 은퇴가 2007년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진짜 야구를 그만둔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년 동안은 무얼 했다는 것일까. 최익성은 야구를 하기 위해 도전했던 시기까지 자신의 선수 생활 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누가 시켜서 마지막 까지 버틴 것이 아닌 만큼 끝도 자신이 결정한다는 의미였다.

그 2년간 최익성은 사기를 당하거나 의외의 사건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한 적도 있었다. 크게 좌절했지만 그런 시련도 최익성을 무릎꿇게 하진 못했다.

향남이와 훈련을 하던 중 (전)승남이도 합류했다. 둘은 미국 LA로 출국해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난 팀 훈련이 필요한 타자였던 탓에 홀로 한국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첫 목표는 미국 독립리그였다. 겨울이 지나고 난 무작정 미국에 들어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승남이로부터 "기약이 없으니 미국 들어오는 걸 다시 생각해보라"는 조언도 받았지만 더 이상 한국에 머물러 있는 건 무의미했다.

은퇴 전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모아두었던 돈을 모두 뜯긴 나로서는 미국에 가는 것 조차 쉽지 않았다. 난 결단을 내렸다. 차를 팔기로 한 것이다.

차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힘겨운 시간 난 차를 타고 길을 달리며 마음의 위안을 찾곤 했다. 내겐 마지막 남은 믿을 구석이었다. 그러나 미국행 의지를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난 친구에게 차 정리를 맡기고 조금의 여비만 손에 넣은 채 미국으로 향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선배들의 소개로 독립리그 테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난 근육통이 생긴 허벅지에 바늘을 찔러가며 테스트를 마쳤다. 반응은 좋았다.

그러던 중 한 관계자가 나를 찾아와 멕시칸리그서 뛰어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흔쾌히 그를 따라나섰다.

멕시코에서 테스트도 받았다. 그러나 갑자기 그 관계자가 사라졌다 한참이 지난 후에나 나타났다. 당장 멕시코에 남으라는 것이었다. 짐도 챙기지 않은 상황에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온 뒤 그 사람은 사기성이 짙은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그러던 중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아시아 담당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대만 리그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야구만 할 수 있다면 장소는 중요치 않았다. 일단 그 스카우트의 추천으로 한 독립리그 팀에서 훈련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팀 감독으로부터 직접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 감독은 편법을 써서라도 입단을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뛸 듯이 기뻤다.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로 표현이 안된다. 그러던 어느날, TV에 내 우상이던 호세 칸세코의 동정이 소개되는 걸 볼 수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저 반갑기만 했다.

알고보니 그 뉴스는 칸세코가 독립리그 팀에 입단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들어가기로 한 팀이었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그 감독은 구단주가 상품성 높은 칸세코를 택하는 바람에 일단 다른 팀에서 뛸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난 이미 여비가 모두 떨어진 상황이었다.

이후 한 에이전트를 소개받았다. 에이전트가 있어야 팀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일단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다음 기회를 노리자는 것이었다.

더 이상 미국에 머물 힘이 없던 난,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날 아껴주시던 분들의 도움으로 힘들었지만 훈련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렇게 2006년이 저물어갈 즈음, 난 다시 미국행을 택한다. 어머님이 말리셨다. 그러나 난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챙겨두셨던 내 마지막 재산을 내주셨다.
하지만 새 에이전트도 내 꿈을 이뤄주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채드 크루터(전 박찬호 배터리)가 감독으로 있는 대학(USC)에서 훈련을 하며 팀을 모색했지만 난데 없이 연락이 두절되며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됐다.

USC에서의 훈련을 행복했다. 이런 곳에서 꼭 야구를 더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석달이 흐른 뒤 그마저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시간을 보내다 아무 소득 없이 한국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얻은 것도 많았다. 미국에서의 도전은 인생의 큰 배움으로 남았다. 무엇이든 부딪혀 볼 수 있다는 자신감이 그것이었다. 너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수확이었다.

난 성남고 감독으로 있던 홍우태의 도움으로 어린 선수들과 생활하며 마지막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중 SK에서 연락이 왔다. 김성근 감독님이 테스트를 받을 수 있겠냐는 의사를 물으셨다는 것이다.

순간, 난 당황했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몇달을 허송세월하며 몸 상태가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테스트를 받는다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다시 연락은 오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내 판단 미스였다. 당연히 준비가 돼 있어야 했고, 어떻게든 부딪혔어야 했다. 야구를 1년 이상 쉰 선수에게 준비가 필요하다는 건 그동안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느껴졌을 것이다. 

난 인생의 후회따윈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순간은 너무도 큰 후회로 남는다. 내 생각이 모자랐다. 항상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는걸 뒤늦게 깨달았다.

결국 성남고에서도 더 이상 훈련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난 도저히 야구를 끝낼 수가 없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떨어진 뒤에도 야구를 버릴 수 없었다.

난 홀로 산에 들어가 다시 훈련에 매진했다. 그리고 2007년 추석. 어머님을 뵙기 위해 고향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언제까지 계속 할거니. 이제 그만 둘 수 없을까. 인생엔 더 소중한 것도 있는 거야. 그동안 수고 많았다. 이제 여기서 끝내자."

순간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어머니, 이제 끝낼게요. 이제 야구 그만하겠습니다." 누구도 날 말릴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한마디는 날 기어코 움직이게 했다.

그제서야 난 내 어깨를 짖눌러 왔던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 들었다. 야구를 좋아했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길. 늘 긴장 속에 보냈던 날들과 남들과는 너무나도 달랐던 야구 인생, 이제 끝을 낼 때가 된 것이었다.

난 내 가슴에 말했다. "난 항상 네(내 마음) 말을 믿고 따랐잖아. 다음 인생은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 처럼 널 믿고 갈게. 그게 나니까."

Posted by 카이사르21
인생을 돌아보고
미국에서 90세 이상의 노인들을 대상으로 물었습니다.
질문은 단 한 가지,

90년 인생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후회가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 90%의 사람이 동일한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대답은 무엇이었을까요?
"좀 더 모험을 해 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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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이데일리 SPN 정철우 기자] 2004시즌이 끝난 뒤 최익성은 삼성에서 방출된다. 그에게 손을 내민 팀은 SK.
 
그러나 최익성은 의외의 제안을 한다. 계약하기 전 팀에 합류해 테스트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방출 선수가 그런 요구를 하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다.
 
혹자는 최익성의 괜한 오만과 고집이라 비웃었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절박함의 다른 표현이었다. 자신이 정말 필요로 하는 팀에서 도전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의 누적된 상처가 그를 힘겹게 몰아부쳤다.
 
다만 그는 대화법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포기하는 법도 몰랐다.

 
현대로 옮겨가면서 난 사람들에게 "언제 또 옮겼냐"는 인사를 많이 받았다. 내 이미지가 형성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첫해는 꽤 괜찮았다. 운동장에 있는 자체가 즐거웠고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어 좋았다. 난 좌투수 전문 타자로 자리매김했다. 우완 투수나 언더핸드 투수에겐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우선을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전혀 기회가 주어지지 않던 상황에서 그나마 숨통이 트였기 때문이다.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꼭 다시 한번 운동장을 미친 듯이 누벼보고 싶었다. 2002 시즌이 끝난 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3년 스프링캠프 부터 또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내 타격폼이 또 문제가 됐던 것이다.

이번에도 코치님으로부터 타격폼 수정 지시가 내려졌다. 난 언제나 그랬던 것 처럼 조금만 지켜봐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만해도 그런 내 스타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속 시원히 남자답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2003시즌은 그렇게 시작했다. 역시 출발은 좌투수 전문 타자였다. 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부상이 먼저 발목을 잡았다. 시즌 초 잠실 경기였다. 머리 위로 날아가는 공을 잡기 위해 달리다 보니 어느새 펜스였다.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끝까지 가면 공을 잡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펜스에 부딪힐 것이 분명하다.

망설이지 않았다. 펜스를 향해 돌진했다. 내 야구는 그런 것이니까. 공은 잡았지만 무릎을 다쳤다. 결국 난 2군으로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군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2군에선 좋은 성적을 내고 있었지만 부름을 받지 못했다. 한국시리즈를 앞둔 연습경기서는 9타수 7안타를 쳤지만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렇게 현대와도 이별이었다. 이번엔 친정팀 삼성에서 연락이 왔다. 단장님까지 직접 연락을 해오셨을만큼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삼성에서도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난 다른 선수들과는 출발부터 다른 선수다. 아마추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입단했던 선수들과 같은 조건에서 경쟁할 순 없었다.

내 타격폼이 교과서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폼으로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며 버텨왔다. 그러나 훈련이 시작되면 늘 그 폼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내겐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다. 실패하면 끝이었기 때문이다.

간혹 주위에선 이런 조언을 했다. 감독님이나 코치님 앞에서만 하는 척 하다 경기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고. 그러나 난 그런 융통성도 기본기도 없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 방식대로 인정받는 것 뿐이었다.

다시 시작된 대구 시절은 날 지치게 했다. 다들 날 오뚜기라고 했지만 좌절 또한 컸다.

그때 홀로 술 먹는 법을 배웠다. 술을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지만 바닥까지 추락해봐야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먹는 것 하나까지 신경쓰며 야구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삶에 지칠때면 한번쯤은 술에 기대기도 했다.

그렇게 한번 쓰러지고 나면 난 다시 그 친구(술)를 멀리한 채 야구에 전념했다.

2004년이 그렇게 흐르고, 코치님들은 내게 1년 더 뛸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는 내가 아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난 방출을 원했다. 지난 1년과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난 또 방출선수가 됐다.

이젠 정말 날 원하는 곳에서 뛰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날 SK에서 연락아 왔다. 더 이상 그런 전화가 기쁘지만은 않았다.

난 구단에 테스트를 제의했다. 그저 선수 한명을 뽑아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걸 직접 보고 판단해주길 바랬다.

SK 구단에선 황당해 하면서도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난 영입 제의를 물리치고 테스트를 자청한 뒤 입단한 첫 방출 선수라는 또 하나의 타이틀을 안고 SK에 입단했다.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해 겨울 SK는 KIA에서 박재홍을 영입하고 FA로 팀을 떠날 예정이었던 조원우와도 계약을 하게 된다. 한순간에 외야가 포화상태가 됐던 것이다.

시범경기서 난 9타수 5안타 2홈런의 맹타를 휘둘렀고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다. 작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10타석 만에 2군으로 내려가야했다.

그리곤 2군과 1군을 오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어김없이 부상이 찾아오기도 했었다. 절대 휴식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진통제를 맞아가며 버텼다. 그러던 어느날, TV 하이라이트 속에 비친 날 볼 수 있었다.

내 스윙이 아니었다. 거칠지만 호쾌하던 스윙은 온데 간데 없고 한없이 작아진 날 볼 수 있었다. 계속되는 타격폼 수정 지시에 반발했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폼이 작아졌던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며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내가 돼 있었다.

난 다음날 경기가 기다려졌다. 원인을 알았으니 해법도 찾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삼성 전병호를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때려냈고 다음 경기서도 또 홈런을 쳤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홈런 한방을 또 때려낸다. 추석 연휴, LG전이었다. 1-3으로 뒤진 9회말 2사 1,2루. 난 대타로 타석에 들어섰다.

투수는 김민기. 난 바깥쪽 승부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바깥쪽 커브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방망이가 나갔고 손목이 가볍게 돌아가는가 싶더니 공은 우측 담장을 넘어갔다. 끝내기 스리런 홈런. 완전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던 한방이었다.

결과적으로 난 2005년이 끝난 뒤 SK에서 다시 방출된다. 코치님들로부터 절대 방출은 없다는 약속까지 받았었지만 끝내 방출됐다. 그것도 모든 팀들이 전력 보강을 마친 11월31일에.

며칠 뒤 민경삼 당시 SK 운영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평소에도 날 많이 챙겨주셨던 분이다. 내가 트레이닝 파트에 노하우가 있으니 관련 준비를 하고 있으면 코치로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고마웠지만 거절했다. 학연도 지연도 없는 놈이,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코치를 할 수 없게될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난 야구 선수의 꿈을 버릴 수 없었다. 다시 내 감각을 찾은만큼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리로 나 앉게됐지만 포기는 없었다. 날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 최향남과 함께 화악산에 들어가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Posted by 카이사르21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2000년 이후 최익성은 거의 해마다 팀을 바꾸게 된다. 프로 세계에서 팀을 옮긴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지니스의 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트레이드를 '실패'로 규정 짓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일종의 용도 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최익성의 변화다. 최익성도 처음엔 팀이 자꾸 바뀌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좌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한번도 자신감을 잃은 적은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자신감이 생기는 듯 느껴졌다. 허세가 아니었다. 야구 선수로서 힘겨운 시간이 인간으로서 성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는 믿음에서였다고 했다.

LG 유니폼을 처음 입었을 땐 솔직히 한해정도 쉬어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만큼 어깨 부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수술부터 하고 재활 시간을 가질 계획이었다. 팀도 팀이지만 내가 먼저라는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 계획은 첫날부터 무너졌다. 트레이드 후 구단에 첫 인사를 가는 날, 사장님은 날 정말 극진히 대해주셨다. 나를 진정으로 원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감독님도 마찬가지였다. 이광은 당시 LG 감독님은 내가 꼭 필요했기 때문에 트레이드에 나섰다고 말씀해 주셨다. 날 필요로 하는 팀에서 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잘 알기에 난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너무도 뛰고 싶은 마음이 강해졌다. 날 원하는 팀과 감독님 앞에서 말이다. 병원에선 계속 수술을 권했다. 하지만 내겐 중요치 않았다. '난 육체를 마음으로 지배할 수 있는 선수다'라는 주문을 걸며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난 2000년 시즌 내내 온 몸에 붕대를 감고 뛰어야 했다.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오는 단계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감독님은 물론 동료들도 그런 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난 너무 행복했다. LG에서 뛰는 것이 정말 좋았다. 팬들의 뜨거운 응원도 큰 힘이 됐다.

LG는 아깝게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에 패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괴로운 일이었지만 후회없는 1년이었다.

그리고 난 어깨 수술을 받았다. 재활 기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만 고민하고 있었다.

퇴원한지 며칠 되지 않은 날이었다. 또 운명의 전화 한통이 걸려온다. "여기 해태 타이거즈 인데요…"

FA 홍현우를 LG에서 영입하며 내가 보상선수로 가게됐다. LG에선 내가 수술을 받은 선수이기 때문에 해태가 지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난 "아직 붕대도 풀지 않았는데요"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만큼 정말 LG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난, 절친한 후배 (김)재현이를 불러 밤새 술을 마셨다.

하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짐을 꾸려 광주로 향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해태 역시 날 많이 반겨 주었다. 김성한 감독님은 거포가 부족한 만큼 내게 많은 기대를 하고 계신다고 하셨다. 또 힘이났다.

수술 후 재활기간은 적어도 6개월은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난 욕심이 났다. 해태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방망이를 잡고 싶었다.

문제는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됐다. 내 희한한(?) 타격폼이 문제였다. 내 훈련 과정을 본 적 없는 해태 코치님들은 날 이상한 선수로 보기 시작했다.

난 내가 왜 그렇게 치고 있는지 설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코치님들 눈에 비친 나는 단지 말대꾸하는 선수였을 뿐이었다. 주위에선 날 두고 "코치 지시에 토를 다는 첫 해태 선수"라고 수근거렸다.

나는 어디에 있거나 누구와 있거나 버리지 않는 것이 있다. 내 신념과 나 자신이다. 적어도 날 몇달이라도 지켜본 뒤 타격폼에 대해 이야기해주길 바랐다. 내가 나만의 방식으로 성과가 나지 않을 땐 언제든 바꿀 용의가 있었다.

결국 내 방식은 해태에서의 순탄치 않은 세월을 예고하고 있었다. 2001 시즌은 부상 탓에 많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경기서는 4번 타자를 칠 정도로 회복됐고, 신뢰도 얻고 있었다.

그렇게 2002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스프링캠프 명단 제외라는 날벼락을 맞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뺑소니 차량에 교통사고까지 당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때 한 코치님이 내게 조언을 해 주셨다. 삼성 시절 감독님이었던 분이 당시 KIA 2군 코치님으로 와 계셨다. 그분을 찾아가 속 시원히 이야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분께 전화를 걸었다. "시간되시면 커피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바쁘다며 다음에 보자는 말씀만 하셨다.

며칠 뒤 실내 연습장에서 사건이 크게 터졌다. 그 코치님은 타격 훈련중이던 날 불러 세우더니 이렇게 소리쳤다.

"너,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왜, 전지훈련 못가는 것 때문에 그러냐. 그건 네 실력이 없기 때문이야. 이제 알겠어."

모든 동료들과 코치님들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어이가 없었다. 순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뒤 돌아섰다.

난 감독님을 찾아갔다. 진짜 이유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야구를 못해 전지훈련을 가지 못하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려 했다.

감독님은 뜻밖의 말을 하셨다. "너 아프다고 해서 안 데려가는건데. 아파서 훈련도 제대로 못한다고 하더라고."

난 당시 하루도 훈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감독님, 아픈 곳도 없고 훈련을 소홀히 한 적도 없습니다"라고 내 사정을 이야기했다.

감독님은 놀라시며 "그래? 그럼 전지훈련 가자. 어서 가서 매니저 오라고 해"라고 지시하셨다.

그러나 전훈 명단에서 제외됐던 탓에 비자가 준비 안되는 등 문제가 생기며 결국 전지훈련을 가지 못했다.

후에 들은 얘기론 나와 관련된 보고서엔 늘 부상 때문에 정상 훈련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2002시즌은 내게 최악이었다. 난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려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고 훈련방식에 대한 문제로 한 코치님에게 뺨을 맞기도 했다.

즐기지 않던 술에 의존한 적도 있었다. 날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전 9시 훈련이 예정돼 있어도 미친 듯이 술을 먹었던 적도 있다. 광주 원정경기를 왔던 (이)승엽이가 도와줘 겨우 숙소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시즌의 절반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날,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만후 코치님이 날 부르셨다. "익성아, 네가 겪은 모든 상황들에 대해 내가 사과할게. 넌 잘못 없다. 그리고 너 같은 놈은 꼭 잘돼야 한다. 힘들겠지만 이겨내라."

난 눈물이 났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김 코치님의 도움으로 이틀간 휴가를 낼 수 있었고 그렇게 곧장 길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또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현대로 트레이드 됐다는 것이었다. 너무 기뻤다. 새로운 팀에서 다시 야구를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그때, 난 홀로 짐을 꾸려 수원으로 떠났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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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은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스피노자


한국을 빛낸 두 장인, 진창현 씨와 전용복 씨. 그들은 각각 바이올린 제작과 옻칠에서 장인의 예술 혼을 불살랐다. 그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더욱 화려하게 타올랐다.

세계적인 바이올린 제작자인 진창현 씨가 바이올린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불가능에 대한 도전’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들은 ‘바이올린의 신비’라는 강연에서, 명기 스트라디바리우스의 소리를 재현하는 것은 현대 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그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바이올린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서자, 진창현 씨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바이올린 장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문전 박대를 당하자, 바이올린 공장 직원들을 개인적으로 접촉해서 하나 둘씩 배워 나갔다. 그렇게 배운 방법으로 그는 바이올린을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한 번 몰두하기 시작하면 밥 먹는 일도, 잠자는 일도 잊고 미친 듯이 바이올린에만 매달렸다. 매일 새벽 두세 시까지 땀 투성이가 되어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1976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2회 ‘국제 바이올린·비올라·첼로 제작 경연대회’에서 여섯 개 부문 가운데 무려 다섯 개 부분을 석권하는 쾌거를 올렸다. 또 1984년에는 미국 바이올린 제작자협회로부터 무감사 제작자로 인정받고 ‘마스터 메이커’ 칭호를 받았다.

옻칠 장인 전용복 씨는 일본의 유서 깊은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 복원 사업이 있을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 일을 맡을 수만 있다면 일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작업에 앞서 그는 다양한 옻칠 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전역의 유명한 옻칠 장인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메구로가조엔을 복원할 사람을 결정하는 자리에 섰을 때, 전용복 씨는 브리핑을 끝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분명히 얘기하지만, 나는 할 수 있소. 불가능하다고 한 사람들과 내가 무엇이 다른 줄 아시오? 그들은 목숨을 걸지 않았고, 나는 목숨을 걸었다는 점이오. 아시겠소?”

결국 1조 원대의 엄청난 공사가 전용복 씨의 손에 떨어졌다. 옻칠이 10톤이나 소요되는 엄청난 작업 분량을 전용복 씨는 30여 명 가량의 인원만을 대동하고 진행했다. 그런데 마지막 6개월을 남겨두고 문제가 발생했다. 후반 작업을 도와 줄 한국 기술자들의 입국이 거부된 것이다. 남은 작업을 30여 명이 마무리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지난 2년 6개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온 작업을 일본인들 손에 넘겨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죽기살기로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일은 두 개의 방에 금박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개관일이 다가오면서 기술자들은 피로에 지쳐 하나 둘 쓰러졌다. 작업은 결국 개관일 새벽 3시에 끝났다. 3년 동안의 복원 작업은 연인원 10만 명분에 해당하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메구로가조엔의 복원은 그 해 일본의 가장 큰 뉴스였으며, 전용복 씨는 세계적인 칠예 작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출처 : Success Part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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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일 아침에 세수하면서 먹은
첫 마음으로 1년을 산다면

학교에 입학하여 새 책을 처음 펼치던
영롱한 첫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처음 눈이 맞던 날의 떨림으로
내내 함께 한다면

첫 출근하는 날
신발끈을 매면서 먹은 마음으로
직장일을 한다면

아팠다가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몸을 돌본다면

개업날의 첫 마음으로
손님을 늘 기쁨으로 맞는다면

세례 성사를 받던 날의 빈 마음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신앙 생활을 한다면

나는 너, 너는 나라며 화해하던
그날의 일치가 가시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그때가 언제이든
늘 새 마음이기 때문에
바다로 향하는 냇물처럼 날마다가
새로우며 깊어지며 넓어진다.


-정채봉의 《내 가슴 속 램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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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우리가 송진우(은퇴.한화 코치 연수 예정)를 여전히 '회장님'이라 부르는 건 그가 초대 선수협회 회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구단의 강한 협박과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신의를 지켜낸 상징적 인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송진우 뿐 아니다. 양준혁 마해영 최태원 박정태 김재현 심정수 등 당시의 주축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이름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 선수협회를 만들고 끝까지 지켜낸 사람은 그들 스타 플레이어들만은 아니었다.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선수들도 함께 남아 선수협회를 지켜냈다.

어쩌면 그들의 공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야구는 할 수 있었던 특급 수들과는 달리 진짜 야구 인생을 걸고 도전했었기 때문이다. 최익성은 지금도 그들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며 이야기하는 몇 안되는 야구인이다.

최익성은 최근 선수협회가 자신에게 10주년 기념 행사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그때 끝까지 남아 싸웠던 잊혀진 선수들을 찾아 감사패를 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1999시즌 우승 후 어깨 치료를 위해 일본을 다녀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무심코 집어든 신문에서 놀라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프로야구 노조 분쟁'이라는 검은 글씨의 제목.

처음엔 그렇게 큰 일인 줄 몰랐다. 절친했던 양준혁 선배가 도와달라기에 그러겠다고 했었을 뿐이다.

예상보다 파장이 컸다. 구단 사무실에 들어가자 선수단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구단은 구단대로 선수들을 갈라 놓으려 애쓰는 중이었다.

난 이것 저것 생각하지 않았다. 늘 하던대로 행동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지금의 내가 있게 해 준 야구, 그 야구를 위해서, 후배를 위해서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 선수들은 날 따랐고 고참들은 한발 물러서 있었다. 중간쯤 위치였던 내가 결국 리더가 됐다.

후배들은 매일 내게 연락을 했고 나를 중심으로 뭉쳐 행동했다. 그리고 총회 당일. 우리는 집결지에 모여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려 했다.

먼저 선배들이 막아섰다. 내게 크게 화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네가 뭔대 애들을 이끌고 가냐. 한화에 온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설치냐. 네가 우리 팀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냐."

난 대답했다. "우리팀, 그리고 선배들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 도움이 필요한 야구 선배,후배가 있다면 언 언제라도 이렇게 행동할겁니다. 이해해주십시오."

그러자 그 선배도 길을 터주었다. 우린 그제서야 버스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버스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었다. 감독님은 버스에 올라타 성난 목소리로 "이제 나랑 야구 안하겠다는 포기 각서를 쓰면 보내주겠다"고 외치셨다.

선수들의 얼굴에서 주저하는 빛이 역력했다. 난 앞으로 나갔다. 각서를 쓰겠다고 했다. 감독님은 크게 놀라셨지만 난 각서에 지장을 찍고 버스에서 내렸다.

결국 버스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서울로 가려했던 후배들을 이끌고 총회장까지 갔다. 그땐 정말 이대로 야구를 못하게 되더라도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동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막상 총회장에 가보니 실망스러웠다. 선수간 갈등,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선수들을 위한 단체인데 선수들 사이에서 분란이 크게 불거졌다. 결국 전체가 아닌 일부 선수만으로 선수협회가 출범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생활을 말할 수 없을만큼 힘들고 참담했다. 역삼동의 한 여관에서 단체 생활을 했는데 지도부를 제외하면 밖에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나머지 선수들은 구단과 가족의 끊임없는 설득에 흔들려야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네가 어떻게 이자리까지 왔는데 그걸 포기하느냐. 넌 다른 선수와는 다르다. 입장이 다르니까 순순히 고개 숙이고 야구를 더 해야 한다"고 말하셨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머니를 설득해야 했다. "어머니, 제가 저를 버리고 나를 속이면 야구 계속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는 그 이후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계속되며 하나 둘 씩 숙소를 떠나기 시작했다. 일부에선 그런 선수들을 배신자라고 손가락질 했다.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용기내어 함께 했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조현 홍우태 박재용 정영규 등 적지 않은 선수들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선수협회를 지켜냈다.

그렇게 고생한 선수들을 모두 배신자를 만들 순 없었다. 난 지도부를 찾아갔다. "선배님, 자신 있으면 대표 8명만 남고 모두 보내줍시다."

실제로 그 선수들은 선수협 사태가 종료되면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선수들은 달랐다. 더 이상 버티면 야구 선수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었다. 또 참석하지 않았던 선수들에게 누군가 우리의 고통을 전해줘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일부 선수들의 생각은 달랐다. 선수들이 더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정말 야구를 그만 둘 각오였다. 그렇다면 몇명이 더 남아 있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 논쟁을 거치며 난 내가 너무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다. 갑자기 야구가 너무 하고싶어졌다.

어깨 부상이 심했던 난, 선수협에 남아선 훈련할 수 없었다. 전지훈련에 합류하기로 결정한 이유다. 날 배신자로 손가락질 해도 상관 없었다. 구단에는 조건을 달았다. "만약 캠프가 끝난 뒤에도 사태가 종료되지 않았다면 난 다시 선수협에 합류하겠다"는 것이었다.

캠프지에서 난 이정훈 코치님과 한 방에 배정됐다. 매일 밤 설득 작업이 계속됐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코치님이었지만 내 뜻을 굽힐 순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한국으로 돌아갈 시기가 됐다. 난 송지만 등 몇몇 후배들과 다시 계획을 짰다. 한국에 돌아가는 대로 다시 활동하기 위해서였다.

막상 한국에 들어가고 나니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했다. 노조로는 가지 못한 채 선수협으로 남게 됐다.

선수협 문제는 내게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더 이상 한화에 남아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범경기가 한참이던 어느날, 난 또 전화 한통을 받게 된다. "여기 LG트윈스 인데요…" 트레이드였다.

그래도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난 행복한 놈이다. 그때 함께했다는 이유로 유니폼을 벗게 된 선수들의 이름을 우린 절대 잊어선 안된다.

Posted by 카이사르21

 옛 중국에 기창이란 명궁이 있었다.
기창이 활을 배울 때 맨 먼저 습득해야 했던 것은 아무리 주변이 움직이더라도 마음은 그에 따라 동요하지 않게끔 한 곳에 잡아 두는 훈련이었다.

아내의 틀밑에 누워 실북이 좌우로 부산하게 오가도 눈꺼풀이 깜빡거리거나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2년간 훈련을 했다.
이렇게 마음의 정처를 잡고 나니 이제는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그것에 몰두하면 커 보이게 하는 훈련이 뒤따랐다.
기창은 남쪽 창 아래 말총에다 이 한 마리를 매어 두고 멀리에서 그것을 보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이가 점점 커 보이더니 3년이 지나니까 수레바퀴만큼 커 보이기까지 되었다.
이와 같은 훈련법을 통해 기창은 훌륭한 명궁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혼다는 어렸을 때 옛날 무사 신분이었던 떠돌이 아저씨께 들었다.
이 때 혼다는 가난한 대장간 집 아들로 태어나 겨우 소학교만 마치고 수리 공장의 견습공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처지에 크게 좌절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는 이 아저씨의 이야기를 자신의 인생 행로의 큰 전환점으로 삼았고 결국 혼다 자신도 그 자신의 내부에서 끌어낸 정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부단한 기능 훈련으로 일본의 성공한 경영인이 되었던 것이다.

혼다는 왼손 엄지 손가락이 깨져 형태가 없어지고 엄지 검지는 첨단 부위가 절단 되어 오른손보다 짧은 짝손이 될 정도로 수리공인 자신의 직업을 갈고 닦아 첨단자동차 공업에 필수적인 수십 수백가지의 부속품을 발명 개량해 냈다.

Posted by 카이사르21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세상살이가 녹록치 않은 건 삶이 그리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열심히 내 일만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는 때로 삶을 어려운 궁지 속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최익성이 한화로 트레이드된 1999년은 그가 자신있게 ‘전성기’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최익성은 뜻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펼칠 수 없었다. 기량 탓 만은 아니었다.

최익성을 원한 것은 당시 한화 사장이었던 이남헌 사장이었다. 이 사장은 최익성의 플레이 스타일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한화 감독이던 이희수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기존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최익성은 자신의 선택과는 무관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의 사이에 끼어 힘겨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트레이드 통보를 받은 뒤 짐을 싸 대전으로 갔다. 조금 어색했다.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겐 야구가 있었고 목적이 있었다. 삼성이 날 보낸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고 싶었다.

나는 더 독해지고 강해졌다.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어찌나 훈련을 많이 했는지 코치님들이 말릴 정도였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건 내가 이제껏 했던 일 중 가장 쉬운 일이었다.

이정훈 코치님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선수 시절 악바리로 불렸던 이 코치님은 내게 늘 조금 모자란 듯한 훈련량을 요구했다. 자신이 너무 지나친 훈련 탓에 부상이 잦았던 기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내 직성이 풀릴때 까지 훈련했다.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코치님도 결국은 날 도와주셨다.

그렇게 99시즌이 시작됐다. 당시 한화 외야는 무척 탄탄했다. 송지만 데이비스 이영우로 이어지는 라인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그러난 난 한번도 뒤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같은 출발 선상에서 스타트만 된다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같은 출발만 되면 말이다.

시범경기는 나쁘지 않았다. 10타수 3안타 1홈런. 무난했다. 그리고 개막전. 공교롭게도 대구 삼성전이었다.

운명의 장난처럼 여겨졌다. 한때 내 심장이었던 대구 야구장. 난 밤잠을 설쳤다. 최고의 컨디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내가 갖고 있던 모든 징크스도 한꺼번에 동원했다. 내가 미친 듯 뛰어다니는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만원 관중이 들어찬 대구구장은 경기 전부터 들썩였다. 양 팀 선수 소개가 이뤄지는 순간, 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스타팅 멤버에 내 이름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경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는데...

하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시간은 많고 준비는 돼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한번만 기회가 주어지면 모든 걸 보여주리라 다짐했다.

그러나 3연전 동안 난 출장 기회를 잡지 못했다. 허탈했지만 넋을 놓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5번째 경기를 앞두고 이영우가 손목 부상을 당했다. 경기에 나서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영우에겐 미안했지만 내겐 기회였다. 그러나 난 그 경기도 선발 출장하지 못했다. 다른 선수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오래지 않아 내게 찬스가 왔다. 5회부터 대타로 등장. 난 2타수2안타1홈런을 때려냈다. 이후 꾸준한 출장이 이뤄졌고 난 5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최고의 감각을 이어갔다. 시즌 초반이었지만 타격 전 부문서 선두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제 됐다. 출발은 좀 늦었지만 이제 전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난 다시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됐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친하게 지내던 한 코치님께 물었다. “제가 왜 경기에 나가지 못하는 겁니까.”

코치님은 조용히 “익성아, 미안하다. 우리도 이야기는 하고 있다”고 하셨다. 도대체 뭐가 미안하다고 하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데 왜 경기에 나가지 못한다는 것일까.

팀은 내게 대타를 원했다. 난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은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난 거칠어졌다. 난 길들여지지 않은 야수였고 더 큰 먹이가 필요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건 그 덩어리가 너무 작았다.

그 무렵, 뜻하지 않은 부상이 찾아왔다. 송구 도중 오른쪽 어깨 인대에 무리가 온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난 통증을 참으며 경기에 나섰다. 가뜩이나 부족한 기회마저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혼도 오래가진 못했다. 결국 손가락도 들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적된 스트레스 탓에 원인 모를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난 2군으로 내려가야 했다.

힘겹게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날, 한 코치님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된다. 트레이드가 거의 성사단계라는 것이었다. 난 기뻤다. 감독님도 “다 됐으니까 준비 잘 하고 있으라”며 격려해 주셨다.

하지만 결국 트레이드는 무산됐다. 나중에 들으니 사장님의 반대가 있었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내게 더 중요한 건 눈 앞에 놓인 야구였다.

삼성과 한화팬들 덕에 올스타 베스트9에 선정되는 기쁨도 누렸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후반기를 마쳤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롯데와 경기는 잊을 수가 없다. 스타팅 멤버는 아니었지만 경기를 즐긴다는 마음이었다. 사직 구장 3만 관중의 함성은 전율을 느끼게 했다.

1차전서 난 4-4 동점 상황에서 대타로 나가 투런 홈런을 때려냈다. 홈런을 때리고 그라운드를 도는데 구장 전체가 고요했다. 삼성 2군에서 경기해본 이후 홈런치고 조용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결국 한화는 4승 1패로 롯데를 꺾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다. 내 야구 인생에서도 첫 번째 경험이었다. 난 축하연에서 단상에 올라가 춤까지 춰가며 기쁨을 만끽했다. 지나온 세월을 잊고 새출발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세상은 또 한번 요동치고 있었다. 선수협 사태는 내 인생을 또 한번 알 수 없는 곳으로 몰아갔다.
 

Posted by 카이사르21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상사의 명령은 법이나 다름없다고들 말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다. 지시가 옳지 않다 생각되면 문제점을 제기하고 또 수정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하지만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혹 문제가 바로잡히더라도 괜히 골치 아픈 사람으로 낙인 찍히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때문에 그냥 입 닫고 하는 척이라도 하는 것이 맘 편하게 느껴진다.

최익성은 늘 그게 안됐다. 궁금한게 있으면 찾아가 물어야 했고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건 만나 따져야 직성이 풀렸다. 그 대상이 감독이어도 상관 없었다. 결국 그의 풍운은 그런 그의 심지 굳은 행동에서 출발하게 된다.

거듭 말하게 되지만 난 교과서적인 타격폼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초도 부족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 목표는 '메이저리거처럼 치는 것'이었다.

야구를 홀로 독학하며 익히던 대학시절, 난 메이저리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당시 메이저리그를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AFKN에서 새벽에 중계하던 것을 빼면 오후 6시30분 CNN의 스포츠 뉴스를 보는 것이 유일했다.

난 두가지를 빼놓지 않고 보려고 노력했다. 야구 뿐 아니라 모든 프로스포츠에 매료됐던 시기였다.

어디서 저런 다이나믹함과 스윙이 나올까. 나는 연구했다. 결론은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래, 힘이다. 결국 기술의 한계는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둘이 함께 된다면 더 큰 능력을 낼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난 웨이트 트레이닝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내 우상은 호세 칸세코였다. 칸세코와 같은 선수가 된다는 것이 내 프로젝트였다.

그때만해도 동양과 서양의 야구는 달랐다. 모두들 "우리는 체형이 다르기 때문에 다른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들 했다. 일본식 야구가 대세였다.

내 생각은 달랐다. 같은 인간인데…. 내가 노력해서 서양 선수 같은 힘과 체형을 갖추면 되지 왜 안된다고만 먼저 생각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모해 보였지만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사실 조창수 감독님과도 트러블이 있었다. 남들이 이해하기 힘든 타격폼을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날 이해해 주시고 다음날이면 웃는 얼굴 맞아주셨다. 늘 감사했다.(대표적인 일본파 지도자인 백인천 감독도 그의 스윙을 용인했었다.)

다시 감독 교체기로 돌아가 보자.

난 소문이 현실로 바뀐 뒤에야 주위에서 왜 날 그리 걱정해 주었는지 알게 됐다. 새로운 감독은 코치였을 때 타격폼 탓에 나와 큰 충돌을 빚었던 인물이었다.

2군 시절 그 코치는 내 타격폼과 캐치볼 실력을 늘 대놓고 놀리곤 했다. 96시즌이 끝나고 마무리 훈련 때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타격 훈련하는 그물 뒤에서 어김없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쟨 안돼. 저게 스윙이야. 저렇게 백날 해봐 선수가 되는지."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날 따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 "안된다"는 표현이 너무 괴로웠다.

난 돌아서서 물었다. "코치님, 왜 제가 안된다고 하십니까."

"넌 안돼. 그 스윙으로는 절대 안돼."

"전 할 수 있습니다. 1년만에 좋은 성적도 거두지 않았습니까."

"안돼. 2군에서나 통하지. 넌 130km 넘는 공은 절대 못쳐. 넌 1군 선수가 아니라 2군 선수야."

"전 충분히 잘할 수 있습니다. 꼭 해냅니다. 만약 1군에서 좋은 성적이 나면 어떻게 하실겁니까."

"그 스윙으로 잘되면…어쨌든 그런 일은 없다."

그렇게 논쟁은 끝이 났다. 1년 뒤 난 20-20을 달성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그리고 그 코치가 감독이 된 것이다.

동료들은 걱정이 많았다. 그러나 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가장 중요한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환경이나 조건 따윈 생각해본 적 없다.

스프링캠프 때 감독은 내게 한마디를 더 했다. "타격폼 바꿀 수 없겠냐."

난 이해할 수 없었다. 첫 풀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냈고 나 자신도 스윙에 완전히 적응한 상황이었다.

노스텝으로 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스텝 없이 치면서도 충분히 힘을 실을 자신이 있었다.

아닌 것을 "예"라고 할 순 없었다.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훈련이 끝나자 한 코치님이 날 부르셨다. "익성아, 그래도 감독이니까 시키는대로 해라. 아니면 하는 척이라도 좀 해라."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할 말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야구 인생이 걸린 문제라구요."

하지만 코치님의 말도 무시할 순 없었다.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애쓰며 캠프를 마쳤다.

시범경기를 앞둔 어느날, 갑자기 2군행 통보가 내려졌다.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범경기를 보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다른 선수들이 나보다 잘하면 어쩌지?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내 훈련이었다. 내겐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개막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 다시 1군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98시즌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시즌 초반 두달간 97년의 두배 가까운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내 타순에 변동이 생겼다. 톱타자였던 난 5번타자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톱타자로 나서는 것이 편했지만 팀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데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부상의 덫에 또 빠지고 만다. 무릎에 공을 맞아 수비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고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다 어깨와 허리를 다쳤다.

주위에선 며칠 휴식을 권했지만 난 어떻게든 경기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시도는 내 성적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얼마 뒤 난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타순도 매번 바뀌었다. 5~6개의 타순을 오가며 아쉬움 속에 시즌을 마쳐야 했다. (시즌 타율 2할6푼2리 14홈런 20도루)

시즌이 끝난 어느날, 모처럼 영화관을 찾았다. 중간쯤 됐을까. 전화벨이 울렸다. "익성씨 죄송합니다.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됐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서둘러 영화관을 나섰다. 김태한 선배와 김태균, 이승엽 등과 함께 술을 엄청 마셨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날 아껴주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그래서 힘을 냈다. 날 버린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짐을 꾸리고 다시 출발했다. 다만 그때까지는 그것이 내 저니맨 인생의 출발점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Posted by 카이사르21

그 즈음 나는 화장실에서 새벽까지 공부를 해야 했으므로 안팎으로 피곤하기 짝이 없는 가을이었다.
기숙사는 밤 10시30분이면 완전히 소등을 했다.
나는 기숙사 사감의 순시가 시작되는 11시까지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다가 순시가 끝나면 일어나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장소인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서 밤 1시까지 공부를 계속했다.

때로는 꼬박 밤을 새우면서 새벽 3, 4시가 될 때까지 화장실을 지키곤 했는데, 그러다가 4시에 청소부가 들어오면 할수 없이 옆의 샤워실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샤워를 하면서 책을 들고 있을 수는 없었으므로 그때는 공부한 것을 머릿속에 하나씩 떠올리며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화장실에서 밤새 공부하는 것은 여름보다 겨울이 더 괴로웠다.
아무리 수세식 화장실이지만 히터가 후끈후끈 들어오면 불쾌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 홍정욱의 7막 7장 中 -
Posted by 카이사르21
나는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아주 자주 읽는다.
자서전이든 인터뷰든 간에 자주 자주 성공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서 배울려고 노력한다.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열정을 충전하는데 이 만한 방법도 드물 것이다.

작년 한해 동안 몇 권의 성공 이야기를 읽었는가.
그것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성공을 원하는 정도를 나타낸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정상에 선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그들의 방법을 배우는 사람은 언제나 정상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은 일상의 빠듯한 삶 속에서도 우리에게 열정을 듬뿍 채워줄 것이다.
- 공병호 칼럼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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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미국에서 자동차 산업이 한창 발전을 거듭하고 있을 때, 자동차 사업을 크게 일으키려는 포드에게는 새로운 8기통 엔진이 절실했습니다.
스피드와 힘이 있는 차만이 경쟁을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포드가 결심한 그 날부터 설계 기사들은 머리를 싸매고 8기통 엔진의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불행히도 ‘불가능’이었습니다. 여덟 개의 실린더를 하나로 묶는 엔진은 이론상 설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드는 기술진을 보강하고, 투자를 늘리는 등 모든 사운을 새로운 엔진 개발에 걸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결론은 ‘불가능’이었습니다. 모든 기사와 임원진들은 허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포드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대안은 없다. 8기통 엔진뿐이다. 그래야 우리가 산다.”

포드는 자신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실의에 빠진 기사들을 격려하며 침식을 같이 했습니다.
연구실의 불은 밤새 꺼질 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엔진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자동차 역사의 신기원이 이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포드는 명실공히 세계의 자동차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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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그는 가정부를 고용했었는데 그 가정부는 단 한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여기저기에 온갖 책들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는 탓에 서재가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집안 어디에나 책이 널려 있었다.
벽난로 선반을 비롯한 모든 선반은 말할 것도 없고 창턱이나 의자 위 등에 비딱하게 기울어진 채로 책들이 쌓여 있었다.
가끔씩 털이개로 책의 먼지를 털려고 하면 슈바이처가 "책을 거드려서는 안됩니다"라고 꼭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함부로 털이개도 댈 수 없는 처지였다 한다

-슈바이쳐 자서전 中 -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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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카이사르21
나는 사명 선언문을 프린트하여 예쁜 액자를 여러 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그 액자들을 놓아 눈만 뜨면 이 사명과 비전이 내 눈을 찌르고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수첩에도 적어 놓고 수첩을 펼칠 때마다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나중엔 가로 새로 1m 크기의 현수막을 만들어 책상 앞에 정면으로 걸어 놓았습니다.
휴대용으로 별도로 제작하여 여행지의 숙소에도 걸어 놓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전형적인 월급쟁이 였습니다.
그러나 그날부터 뭔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강헌구 박사 강연 中-

강헌구 박사는 국내에서 유명한 성공학, 동기부여 전문가이다.
현재 그가 출판한 서적은 100만권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고 중국 일본에까지 출판계약이 이뤄져있다.
그가 만든 비젼스쿨도 전국 곳곳에 설립되어 있다.

Posted by 카이사르21

직감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읽어보기를 잘했다"고 자신이 진심으로 생각한 책을
 언제나 자기 주위에 두고 때때로 책장을 훌훌 넘기며 읽어보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수련을 쌓으면 서점에서 잠시 서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그 책이
좋고 나쁨의 진가를 알게된다.
책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하면서도 정확한 안목이 생기는 것이다.

- 와타나베 쇼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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